최근 정부와 여당이 심지에 불을 붙이고 휘발유까지 뿌린 ‘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점점 더 크게 번져가면서 온 나라를 그 불판으로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이 논란에서 이제 ‘역사’와 ‘교과서’는 사라지고 ‘정치적 이해(利害)’와 ‘이념’만 남아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JTBC의 <문학 교과서가 '헬조선' 열풍 부추기나?>(15. 10. 29.)라는 보도를 보면, 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고 나가려는 새누리당이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개최한 ‘역사 바로 세우기’ 포럼에서 어느 인사가 “우리가 올바른 역사 세우기를 위한 역사교과서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이것이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교과서, 문학교과서, 윤리교과서, 사회교과서 모두에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기적의 힘은 사라지고 불평과 남 탓과 패배감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이 주장을 펴는 이들은 심지어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과 신경림의 시 「농무」도 ‘교과서에 수록해서는 안 되는 문제 작품’으로 지적했다고 합니다. 더욱 웃기는 일은, 문제의 발언을 한 인사에 대해 집권 여당의 대표라는 이가 “내가 발견한 우리 이 시대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면서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하는데 밤잠 자지 말고 전국 돌아다니면서 강의를 하고 다니시길 부탁한다”고 했다는 점입니다.
이럴 때 어른들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자던 소가 벌떡 일어나 웃을 일!’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웃고 말 일이 아닙니다. 답답해서 화병이 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이 기사를 보고서 저는 이런 느낌을 적어보았습니다.
“이들에게 방법은 딱 한 가지. ‘아예 학교를 없애라. 아니면 자유경제원에서 전국의 모든 교육기관을 접수하라. 말을 안 들으면 왼쪽 팔뚝에 <자유>라고 <붉은 완장>을 채운 홍위병들을 보내서 부숴버리고, 말을 안 듣는 교장 교감과 선생님들은 모두 삼청교육대로 보내라!’
표적과 엉뚱한 쪽으로 화살을 쏘아대다가 안 맞는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선수에게 ‘영웅’ 칭호를 붙여주는 이들은 또 누구인가? ‘영웅’ 칭호를 남발하는 곳은 남(南)이 아니라 북(北)이었는데. …… ㅉㅉㅉ” (히틀러도 그랬고, 북쪽 정권에서도 자신들 말 잘 듣고 앞장서서 유일사상을 전파하는 이들에게 ‘영웅’ 칭호를 붙여주곤 했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무래도 이들이 이쯤에서 멈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미술과 음악 교과서까지, 초 ‧중‧고등학교의 모든 교과서를 대상으로 자신들 입맛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좌(左) 편향’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여서 공격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나라의 교육과 사상, 문화 예술계를 포함한 일상의 삶까지 자신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지 않으면 ‘편향’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될 것입니다. 소름 끼치는 예감인데, 과연 이 예감이 전혀 근거가 없을까요?
가까이는 전두환 정권과 유신 시절의 그 살벌했던 검열과 사상 통제, ‘유일주체사상’에만 매달려 일체의 자유가 박탈된 저 얼어붙은 북쪽 땅,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신음했던 수십 년 전의 중국본토, 히틀러 치하의 독일 …… 이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구교(新舊敎)가 갈등하며 다투는 동안 유럽 전역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두움과 두려움은 또 어떻습니까?
한 가지 사실만 들어보겠습니다.
치열한 투쟁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를 장악한 신교의 칼뱅은 이 시를 감시하기 위해 ‘교회계율’ 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감시하는 조직인 종교국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극히 개인적인 생활 영역도 자동적으로 종교국의 감독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서 열어보면 도덕경찰관이 ‘방문’하러 온 것이다. 어떤 시민도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 기도문을 잘 외우고 있는지, 아니면 왜 칼뱅의 설교에 오지 않았는지 따위를 검사받았다.” “매일같이 이 인간사냥은 계속되었고, 도덕경찰관은 일요일에도 쉬지 않았다. 모든 거리를 돌면서 문마다 두드리고 어떤 게으름뱅이가 칼뱅의 설교에 참석하지 않고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는지 확인했다. 교회에서도 다른 감시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누가 교회에 너무 늦는지, 누가 교회를 너무 일찍 나서는지 감시했다”고 합니다.
결국 칼뱅이 ‘교회계율’을 실시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제네바 시는 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이제 “가볍고 느긋하게 걷지 않았으며, 눈길은 따뜻해 보이지 않았고, 두려움 때문에 감성을 향한 마음의 문도 닫았다. (…) 가장 친근한 공간에서도 그들은 말하지 않고 속삭이는 버릇이 생겼다. 문 뒤에서 하인과 하녀들이 엿듣고 있었고, 만성이 되어버린 공포심 때문에 어디서든 눈에 보이지 않는 밀정이 바로 등 뒤에 있다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학자들이 필자로 참여해 출간한 현행 검인정 국사 교과서 중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史實)의 선택에서부터 이미 필자들의 세계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그 사실을 해석하는 데에 이르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게 만드는 이점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가 아닐까요?
그러나 아무리 ‘다양성’과 ‘자유’가 소중하다고 해도 학자들과 출판사 사이에 너무 크게 차이가 나는 교과서를 발간하면 학생들이 혼란을 겪을 수도 있고,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정부에서 ‘검인정’ 기준을 정해놓고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교과서는 인증을 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퇴출시켜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부와 여당이 나서서 “모든 검인정 교과서가 좌(左) 편향되어 있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국정교과서로 전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일단 이렇게 선언해놓고 난 뒤에 억지로 그 이유를 대려니까 계속 엉뚱한 근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최인훈의 소설과 신경림의 시에까지 ‘붉은 딱지’를 붙이게 되지 않았나 하고 추측해봅니다.
“정부가 정한 똑같은 교과서로 모든 학생을 똑같이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참에 아예 전국의 초‧중‧고등학교를 없애십시오. 여러분들이 입만 열면 내놓는 ‘자유’ 원칙에 따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교육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맡기십시오. 그래서 “부유한 부모는 일찍부터 유학 보내 외국 문화에 익숙하게 만들고(이미 그렇게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능력 없는 부모는 자식들 교육을 포기하라”고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논리대로라면, 아이들은 ‘정부에서 정해주는 것’ 이외에 배워서도 안 되고 정부가 정해주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해서도 안 되며 더구나 그 다른 지식과 생각을 입 밖으로 내서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칼뱅 치하 제네바 시에서처럼 ‘마음의 문도 닫고’ 친한 사람들끼리도 ‘속삭이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문화 예술에서 창조적인 작품이 탄생할까요? 해마다 가을이면 “혹시나!”하고 기대하는 노벨문학상‧경제학상 수상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이 그토록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내세우는 ‘경제 발전’은 가능할까요?
참고로 제가 2년 전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서평(서평 보러가기)을 함께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칼뱅 치하 제네바 시의 암울했던 분위기는 이 책에서 읽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