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7일 월요일, 맑음
윤순심 할메가 공부하는 손자한테 노상하시는 말씀, “아가,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다 도둑놈 되드라. 인간 공부를 해야 한다.” 인간 공부란 “착실허니 살고 놈 속이지 말고 나 뼈빠지게 벌어 묵어라. 놈의 것 돌라묵을라고 허지 말고 내 속에 든 것 지킴서 살아라. 사람은 속에 든 것에 따라 행실이 달라지는 법이여. 내 맘을 지켜가야제 돈 지키느라 애쓰지 말어.”
나주장에 김금산 어르신 하시는 말씀. “내 손을 봐봐. 이 손에 나 다닌 흔적이 다 써졌어. 나는 공부를 몸으로 허요. 낸 몸뚱아리로 온 골짝을 다 기어댕김서 만지고 냄새 맡고 씹어보고 그렇게 허는 것이 공부여. 공부는 평생 허는 것이여. 제사 지냄서 ‘현고학생(顯考學生)’이라고 합디여, 안?” 이번에 온 ‘전라도닷컴’ 12월호에 실린 대화들이다.
그렇다. 어찌 책상 앞에서, 칠판 앞에서 읽고 쓰는 것만이 공부인가? 세상 천지에 저런 선생이 널려 있고 내 마음 속까지 바른 공부의 터이니 언제나 배울 자세만 돼 있으면 공부가 된다. 우리 집에 수많은 잡지가 오는데 그 중 제일 좋아했던 잡지가 ‘녹색평론’이었고 ‘전라도닷컴’을 다시 만나서서는 매달 읽을거리가 솔솔 쏟아진다. 전라도 사람이 아닌 나도 그 지방 사투리를 읽고 되뇌면 그 맛이 찰지고 꼬십다. 읽고 나서는 함양읍내 ‘빈둥’에 갖다 주는데 마담언니 은지씨도, 거기 오는 사람들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성탄이 가까워온다고 보스코가 서랍장을 뒤져 식탁보와 접시, 냅킨들을 찾아냈다. 지난여름 산마르티노 디 카스트로짜에서 마리오의 아내 이레네가 선물로 준 성탄식탁보를 풀 먹여 곱게 다림질하여 이층식탁에 깔고 아래층에는 접시깔개를 성탄용으로 바꿨다. (이레네가 방사선치료에 화학치료에 여간 고생이 아니어 참 걱정된다.)
접시나 식탁보, 냅킨과 접시깔개도 거의 2, 30년 써온 것들이지만 성탄절을 맞아 20여일 쓰고서 다시 손질하여 넣어두니까 새것이나 마찬가지다. 절기를 맞는 나만의 추억, 성탄절에 우리 집을 찾아온 손님들, 그때 장만해서 함께 나눈 음식과 얘기들... 모든 게 생생하다. 앞으로 몇 해나 더 차릴지 모르지만 축제가 있는 삶은 언제나 풍부하고 생기가 넘친다.
점심 후 텃밭에 내려가 우엉을 캤다. 우엉은 직선으로 뿌리를 내리므로 1미터는 족히 땅속으로 뻗어 내린다.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사람들은 아예 소형 포클래인으로 캐낸단다.내년에는 나도 미루네 포크레인이라도 빌려다 캐내야겠다.) 보스코는 그냥 삽으로 서너 토막을 내가면서 캐내다 만다. 땅 속에 남은 뿌리를 두고... 그래도 호미질에 삽질을 하면 우엉마다 제법 기다랗고 늘씬한 몸매를 농부에게 자랑하고 싶을 텐데...
캐낸 우엉을 자루에 담아 메고서 올라와 우물가에서 철수세미로, 칫솔로 깨끗이 말끔히 씻어놓았다. (그 동안 보스코는 지난번 무를 캐며 잘라놓은 무청을 비닐 끈으로 묶어서 감동에 걸었다. 겨우내 시레기 국을 끓일 참이다.)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려서 덖으면 맛있는 우엉차가 탄생한다. “여보, 이거 우엉차 덖어 우리 며느리한테 보낼 거지?”
내일이 우리 며느리 생일이다. 빵기가 보름동안의 동남아 출장에서 제네바로 돌아와 며느리한테 “빵기가 돌아와서 좋지? 근데 뭐가 좋아?”라고 물으니 “애들이 말을 잘 들어 좋아요.”란다. 혼자서 두 사내애와 씨름을 해야 하니 맘고생이 얼마나 클까? 더구나 소리도 지르지 않고 조곤조곤 설득해 가면서 애들을 키우느라 말이다. 며느리 줄 게 어디 우엉차뿐이랴?
큰아들과는 보이스톡을 해서 목소릴 듣고, 작은아들과는 페이스톡을 해서 얼굴까지 보면서 얘기를 나누고 나니까 날씨가 싸늘해지면 황량하던 가슴 밭에 봄바람이라도 불어오는 기분이다. 금방 보고서도 돌아서면 또 보고 싶은 게 자식인데 내가 누구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그리도 자주 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