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2일 화요일, 맑음
“여보, 화단에 꽃 지고 마른 풀들 뽑아서 태울까요?” “언제?” “아침밥 먹고 후딱.” “추운데 오후에 점심 먹고 하면 어떨까?” “그러죠 뭐, 나도 굴깍두기 담그고, 책도 마저 읽고....”
햇살이 좋아 긴방(일년내 햇볕이 들지 않는다)의 침구를 꺼내다 테라스에 널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어제는 배추 겉절이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굴깍두기를 했다. 굴이 김치 속에서 눈에 띄는 걸 보스코가 싫어해서 다져넣었다. 무는 진이네서 얻었다. 시골에서 이렇게 살면 ‘일주일에 2만원만 가져도 살지 싶다.’ 움직이지 않으면, 자동차를 안 굴리면, 서울을 오가지 않으면...
이주여성인권센터 허오씨가 책을 한 권 주기에 받아와서 한편에 두었다가 엊저녁부터 읽기 시작한 참이다. 밤11시에 책을 폈다가 새벽 3시에 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한참이나 뒤척였다. 「열세 살 여공의 삶」. 심순예씨의 대학원 논문이기도 하다.
그니는 1919년 4.3만세운동에서 다친 아버지의 후유증으로, 등기이전 없이 관습적으로 토지를 소유했던 아버지가 땅을 빼앗기면서 7남매와 부모 등 아홉 식구가 졸지에 극빈층으로 몰린다. 일제의 폭력과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빼앗아주는 정책이었다. 나라가 무너지면 평범한 가정의 행복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여준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가장이 아프고 직업이 없으면, 어린 자식들이 부양의 책임을 지고 일터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주인공도 초등학교 3학년을 끝으로 청계천, 평화상가로 나간다. 1966년에 열세 살에 ‘시다’로 취직해서 1974년에 미싱사가 되기까지, 몸을 숙여 기어야 움직이는 다락방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잘도 견뎌낸다. ‘시다’ → 미싱사→ 재단보조 → 재단사 → 사장으로 이어지는 노동서열에서 여성노동자들이 간교하게 통제받고, 1960년대 초기산업화 과정 속에서 어린 소녀가 ‘여공(女工)’으로 만들어지는 비인간적 과정을 본인이 글로 써냈다.
‘청계피복노조’와 ‘전태일’을 통해 ‘여공’이 ‘노동자’로 성숙해가며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노동단축 투쟁, 퇴직금 투쟁, 한글 교육, 연대운동으로 성장해 간다. 그러다 1980년 전두환 군부독재의 재등장으로 노동운동은 배척되고 통제되는 시대가 다시 온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청소년 상담을 하다 보니 공부할 기회를 놓치는 아이들이 안타까워 본인도 2003년에 초등학교 자격 검정고시, 2004년 봄에 중학교학력 검정고시, 그해 가을엔 고등학교학력 검정고시를 마치고 53세 나이에 NGO 특별전형으로 성공회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고서 4학년 2학기에 김수행 교수의 “한국에선 생애사(生涯史) 논문이 없지만 유럽에서는 많다.”는 격려에 힘입어 대학원에 입학한다. 김교수님도 영국 유학시절 지도교수님이 “아이디어는 당신이 내고 글쓰기는 지도교수인 내가 한다.”는 배려를 받아 박사학위를 받으셨단다.
「열세 살 여공의 삶」은 정치경제학계에서 “자본주의 구조발전, 자본과 노동의 계급관계, 이윤증가방법, 노동운동의 역사, 경제변동의 원인과 형태, 한국경제의 발전”을 다룬 훌륭한 석사논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게 어젯밤에 한번 잡은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치열한 삶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을 보여준다.
오후에는 보스코랑 뜰 청소를 말끔히 했다. 봄이 와도 새로 돋는 화초들이 차지하게 제 땅을 잡아주고 나니까 내 잠자리도 편해진다. 뒷계단에 밀린 일도 하나씩 해냈다.
소담정 도미니카가 방문하여 커피를 들면서 새로 부임한 주임신부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병약하지만 따뜻한 사제로 여겨진다는 인물평을 내놓았다. ‘본당주임의 복(福)’ 가운데, 전임자가 엉망이면 후임은 반만 잘해도 된다는 복을 타고났나보다면서 우리 둘이 웃었다.
나는 효소단식 사흘째여서 보스코에게만 저녁상을 차려주고 ‘밥상동무’로 옆에 앉아서 청량고추 장아찌를 담갔다. 소금에 절인 고추 하나하나에 포크로 (간장이나 양념이 배이게) 구멍을 뚫어서 간장으로 한 통, 젓갈로 한 통 담갔다. 누군가 원하면 나눠줄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