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서 ‘경제가 엉망이다’라고 아우성이다. 서민들이 실제 생활에서 느끼기에는 경제학자나 관변 연구기관에서 숫자로 표시해서 발표하는 지표보다도 더 힘든 상황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한 해법은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보다도 더 깊고 넓어 보인다.
재벌들은 돈을 잔뜩 쌓아놓기만 하고 내놓지를 않는다. 혹 총수가 불법을 저질러서 사법처리를 받게 되면, 그때에나 어김없이 ‘사회 환원’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여론을 달래고 이것을 이유로 사법부에서 선처(?)를 해주기도 한다. 투옥 생활이 오래도록 이어지게 되면 또 어김없이 ‘재산의 사회 환원’이라는 미끼를 세상에 던지고 언론에서도 “경제를 살리려면 기업이 살아야 한다.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총수들을 가석방‧집행유예로 풀어주고, 나아가 사면까지 해주어야 한다”고 분위기를 띄운다.
그런데 검찰이나 법원이 경제인들에게 너그러운 편인 우리나라에서 재벌 총수들 중에 왜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가는 이들이 많을까.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아서, 자본가 윤리가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일까. 내 짧은 소견으로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들이 돈을 벌기만 했지,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붓다 당시 장자(長者; 요즈음 기준으로 하면 재벌 총수 정도)였던 수닷따(Sudatta)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을 뿐 아니라 그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써서 ‘외롭고 힘든 이들을 돕는 부자’라는 뜻의 ‘아나따삔디까(Anathapindika; 給孤獨長者)’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고, 그 영예가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인물이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대승불교 국가 불자들의 귀에 익숙한 기원정사(祇園精舍)는, 붓다와 제자들이 우안거(雨安居)를 안정적으로 날 수 있도록 이 수닷따 장자가 거액을 보시하여 지은 곳으로 붓다께서 머물며 장마철의 안거를 가장 많이 지낸 곳이기도 하다.
붓다가 이 수닷따 장자와 대화중에 ‘돈을 어떻게 벌어 하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법(法)답고 법에 따라서 얻은 재물”이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리고 보편적인 진리 ‧ 윤리 도덕과 사회 법규에 어긋나지 않게 재물을 모아야 하고,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거나 투기를 해서 얻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앞 구절에 이어 붓다는 이렇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려준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바르게 행복을 지킵니다. 부모를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바르게 행복을 지키게 합니다. 아들과 아내와 하인과 일꾼들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바르게 행복을 지키게 합니다. 이것이 재물을 벌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친구와 친척들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바르게 행복을 지킵니다. 이것이 재물을 벌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
“사문 ‧ 바라문들에게 정성을 다한 보시를 합니다. 그러한 사문 ‧ 바라문들은 교만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인욕하고 온화하게 헌신하며 살면서 각자 자신을 길들이고 각자 자신을 제어하고 각자 자신을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합니다. 이러한 사문 ‧ 바라문들에게 하는 보시는 [보시한 사람에게] 고귀한 결말을 가져다주고 신성한 결말을 가져다주며 행복을 익게 하고 천상에 태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재물을 벌어야 하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5:41; 대림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126~128쪽)
부모와 아내 ‧ 자식 등 가족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종업원과 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시키는 것이 돈을 버는 첫 번째 이유이고, 그 다음으로 친구와 친척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며, 절이나 교회에 가서 출가 수행자와 사제 ‧ 목사님들을 위해 보시와 헌금을 하는 것은 맨 마지막 다섯 번째 이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특정 종교를 가릴 것 없이, 앞의 중요한 두 가지는 잊어버린 채 오로지 마지막 다섯 번째 이유만 신도들에게 가르치고 있고, 신도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거의 모든 종교계에 널리 퍼져서 종교 자체의 파멸을 가져오는 마약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필수품이다. 이 ‘돈’ 없이 세상을 살아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붓다가 수닷따 장자에게 일러주었듯이,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서, 가족 뿐 아니라 종업원과 이웃을 위해서 써야 한다. 이것을 잊고 있으니까, 재벌 총수들이 선물 투기를 하다가 수백억 원을 잃어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본인도 사법처리를 당하기도 하며, 상습적으로 해외원정 도박까지 하다가 교도소에 가는 일도 흔하지만 이들의 반성과 참회는 위기 대응용으로 잠시 반짝 하고 말 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 재벌 총수들의 모임인 전경련(全經聯) 등이 앞장서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더욱 약화시키는 법안을 빨리 통과시키라고 길거리에 나가서 서명을 받으며 국회를 위협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엄연히 삼권분립 정신에 따른 국회의 권한에 대하여 대통령과 국무총리까지 공개적으로 이 서명에 참여하며 그 위협에 동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가진 쪽’과 ‘가진 것 없는 쪽’으로 국민들을 편 가르기 하여 ‘가진 쪽’ 편을 확실하게 들겠다는 선언이기도 한 길거리 서명에 참여하며 대통령이 한 말은,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하여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과정을 떠오르게 하여 섬뜩하기까지 하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고, 그래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목표가 분명하다면, 일방적으로 가진 사람들 편에 서서 입법기관을 위협할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이 어디에서부터 생겨났는지 더 세심하게 살펴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마땅할 것이다. 경제인들에게 “정당하게 벌어서 바르게 쓰고, 법에 따라 세금을 제대로 내라!”고 요구하여야 맞을 것이다.
각 종교의 지도자들이 경제인들을 만나게 되면 “우리 절 ‧ 교회 ‧ 성당에 시주 ‧ 헌금 많이 해주세요!”라고 하지 말고, “바르게 벌어 바르게 쓰라. 여러분이 재산을 모은 것은 힘을 합해준 회사 직원과 노동자들 덕분이고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의 제품을 사주는 소비자인 국민들 덕분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과 총리 ‧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을 만날 때에는 “우리한테 예산 지원 많이 해주세요!”라는 민원 부탁을 할 것이 아니라, 붓다가 수닷따 장자에게 해준 것처럼 “정치를 바르게 해서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라!”는 주문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종교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썩고 곳곳에 사기꾼들이 넘쳐나며 정치인들이 무능하고 부패해도, 이런 훌륭한 종교 지도자가 열 분만 있으면 나라가 이렇게 헤매지는 않을 것이고 국민들 입에서 나오는 ‘헬(hell) 조선’이라는 원망의 소리가 크게 울리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