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6일 화요일, 흐리고 가끔 눈발
간밤에 몹시 추웠다. 보스코는 내복에 조끼를 입고 자기 침대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아예 코트를 덧입고 내 침대에서 잠들었다. 아침에 알고 보니 밤새 보일러가 작동을 멈추었다며 관장 신부님이 몹시 미안해했다.
로마의 겨울을 이겨내느라 고생하시던 안젤라 수녀님. 늘 파랗게 질린 입술에 감기를 달고 살아서 옆에서 보는 사람도 을씨년스러운 로마의 겨울이 느끼게 했다. “수녀원은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곳. 청빈을 핑계로 겨울에 가장 늦게 난방을 시작하고 가장 일찌감치 보일러를 꺼버려 봄이 제일 늦게 찾아오는 곳도 수녀원”이라는 보스코의 평.
“수녀님, 언제가 젤 추워요?” “잘 때요.” 포근함이란 도무지 없고 오래 덮어 무겁기만 한 군용담요 한 장으로 겨울을 나야하는 분들이다. 포근한 오리털 이불을 하나 구해 드렸더니만 “어미 오리 깃털에 싸여 포근히 잠든 아기오리가 되어” 그해 겨울을 무사히 났고, 그 이불은 두고두고 후배 수녀님들에게 물려졌더란다. 20년 전 얘기다.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수도원으로 새벽미사를 갔다. 검은 고깔이 달린 수도복을 입고 줄지어 들어서는 수사님들의 행렬이, 아빠스님이 하사하신 양주를 들면서 밤을 꼬박새운 젊은 교부학자들의 눈에는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로 보였을까?
베네딕토 수도원의 엄숙함은 살레시안들의 분위기와 생판 다르다. 시끄러운 타악기의 소음과 악을 쓰는 아이들 성가소리는 오던 잠도 쫓아내는 곳이 살레시안 성당이라면, 그레고리안 성가로 엄숙하게만 거행되는 이곳 전례는 웬만한 눈꺼풀도 내리 닫히게 만들 법하다.
오전 중에는 분과별 회합이 있어서 어느 곳에도 해당하지 않은 나와 미루는 수도원 경내를 산보하면서 밀린 얘기들을 나누다가 보스코의 책을 몇 가지 구입하러 성물방을 들르기도 했다. 종합발표와 단체사진 촬영과 12시 점심으로 학회행사는 끝났다.
곧이어 같은 피정의 집에서 ‘서양중세철학회’ 학회가 있어 박승찬 교수를 비롯한 중세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모조리 파괴되던 고대문화를 보존하고 중세로 전수해준 베네딕토회의 전통대로 왜관분도회도 여러 학술단체를 성원하고 출판으로 지원하고 있음이 한 눈에 보인다.
1시에 왜관을 떠나기 전 우리 부부와 미루가 면회실로 올라가 아빠스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40대 중반의 아빠스님과 든든한 보좌관 고신부님이 힘든 표정 하나 없이 경건한 수도원과 시끄러운 시국을 함께 운영하는 중이다. 두 분의 표정에 가득한 ‘복음의 기쁨’이 우리에게도 물드는 기분이었다. 좋은 포도주까지 아빠스님에게서 선물받았다.
함양으로 오는 길은 성주를 지나는 행로여서 가야산 기슭의 ‘우리밀농산’ 정섐의 집을 지나칠 수가 없다. 가을에 쑤어 겨우내 띄운 메주를 이틀에 걸려 모두 출하하고 있었다. 그 커다란 곳간에 가득 달렸던 메주가 다 팔려나가니까 맏딸 시집보내듯 허전하다는 율리에타씨의 탄식!
올 가을에 진짜로 시집보낼 진짜 큰딸이 이 집을 진짜로 비우면 정많은 저 여인은 얼마나 헛헛할까? 사윗감과 딸을 앉혀놓고 정섐이 한 마디 했단다. “첫째, 너희에게 물려줄 재산 없다! 둘째, 집에 오려거든 좋은 술 한 병 들고 오너라! 셋째, 처갓집에 와서 일한답시고 눈치 보지 말고 장모가 해주는 맛난 것 먹고 푹 쉬다 가거라!”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농민운동가로 평생을 투신한 정섐으로서는 “아내 등에 빨대 꽂고 살아왔노라.”고 자백하는 처지면서도(엊그제 아내를 '베이스캠프'라고 부르던 김시인의 표현보다 훨씬 리얼하다!) 남편의 부재시 모든 가사와 공장일을 도맡아온 여장부 아내보다 훨씬 정 많은 분이어서 그날 딸을 사위 손에 ‘인수인계’하러 나가는 혼배미사 입장 행진에 눈물을 비칠 사람은 틀림없이 정섐일 게다.
미루는 초면이었지만 정섐의 도자기 수집과 일가견, 손수 차 대접을 하는 팽주이자 구수하게 얘기를 풀어가는 농민운동가에게 흠뻑 빠진 얼굴이다. 미루의 조심스러운 밤 운전으로 가야산을 넘어 고속도로로 산청까지 와서 그곳 약초시장 마당에 세워둔 우리 차로 집에 왔다. 즐거운 소풍으로 온갖 시름일랑 잊게 만든 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