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을 맞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는 1일 오후 4시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 40주년’을 기념하는 미사와 강연회를 열고 시국선언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민족통일이 방향성을 잃은 대한민국이 40년 전 ‘구국민주선언’의 의미를 되새겨, 신독재 시대에 맞설 지혜를 모으기 위해 이날 행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날 미사는 수도자와 평신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 700여 명이 참석했으며, 61명의 신부가 공동으로 집전했다.
미사 주례를 맡은 김인국 신부(청주교구)는 “97년 전 오늘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를 거슬러 자주를 외친 날이고, 40년 전 오늘은 박정희 유신독재를 거슬러 민주를 외친 날이다”라며 “오늘 미사는 이 자랑스러운 두 가지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을 넘어, 나라를 망치고 사람을 못살게 괴롭히는 오늘날 압제와 독재에 저항하겠다는 다짐의 자리이다”고 말했다.
이강서 신부(서울교구)는 강론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역사 앞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고백한다. 그래서 3·1혁명과 민주구국선언은 우리 민족의 구원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사건이다”라며 “특히 2012년 부정선거 의혹으로 당선된 유신독재의 딸 박근혜와 그 정권이 집권한 지금은 압제와 독재에 맞선 삼일절의 의미가 더욱 크다”고 강조했다.
이 신부는 박근혜 정부가 사드 배치 논의와 개성공단 폐쇄 등으로 평화 민족통일을 더욱 멀게 만들었고, 통합진보당 해산과 테러방지법 강행으로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그는 “즉흥적인 결단으로 드러난 개성공단 폐쇄 결정과 한반도 사드 배치 논의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의 시국은 안전핀을 제거한 폭탄을 손에 쥔 형국이다”라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향한 공존의 노력은 폐기되고 대결과 응징으로 치닫는 이 상황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또한, 국회에 상정된 테러방지법에 대해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개입을 정당화하고, 수구기득권 세력의 장기·영구집권을 위해 노골적으로 국정원이 공작정치에 전권을 쥐도록 획책하는 법안”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세월호참사와 노동법 개정안, 민중총궐기 백남기 선생 국가폭력 사건을 언급하며 “박근혜 정권의 국정운영 구호였던 ‘국민이 행복한 나라’라는 말은 이제 기만적인 허언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이 신부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 빼앗기고 짓밟힌 이들의 주권이 존중받는 것이 참된 민주화의 길이고, 자주독립의 문이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이루는 방법이다. 이것이 97년 전 3·1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40돌을 맞는 민주구국선언의 요청을 실현하는 것이다”라며 “가장 가난한 이들의 기본권을 위해 더욱 연대하고 투쟁하자”는 말로 강론을 마쳤다.
이날 미사에서 이영우 신부(서울교구)는 민주주의 회복과 평화통일, 야권의 단결 등을 촉구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인간 존엄을 파괴하는 이 시대의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는 일이야말로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며 ▲ 친일청산과 평화통일 ▲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 ▲ 총선 승리를 위한 야권연대 등을 언급했다.
이 신부는 성명서를 통해 “대한민국은 지금 친일매국세력의 식민사관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방방곡곡을 오염시키고 있는 불행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며 “민주주의에 기초하지 않는 일체의 정치와 통치는 부당한 지배이니 다 같이 나서서 물리치자”고 호소했다. 또한 야권의 단결을 촉구하며 “당파의 이익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과 미래를 염두에 둔 지혜로운 일치에 나서달라”고 주문했다.
“박정희 혼이 다시 청와대에 왔다”
이어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진행된 강연회에는 300여 명의 교계·재야인사가 참석했다. 특히 이날 강연회에는 3·1 민주구국선언문에 서명한 문동환 목사가 9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참석해 민주구국선언 당시의 상황과 의미를 설명했다.
문 목사는 “긴급조치 9호가 나오고, 대학생들이 고문을 당하고, 인혁당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고, 장준하가 암살을 당하는 상황에서 성명서가 만들어졌다”며 “성명서는 ‘진정한 민주주의 하자’,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하자’는 내용이기 때문에 죄일 수 없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를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말했다.
특히 테러방지법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의 혼이 다시 청와대로 왔다. 요즘 선거를 왜곡하는 테러방지법을 보면 똑같은 길을 간다고 생각한다”라며 “민주주의는 국민의 목소리로 이룩되고, 계속해서 국민이 외치기 때문에 거기에 역행하면 불행이 찾아온다”고 지적했다. 이어 “짖지 않으면 또 불행한 일이 올지도 모른다”라며 “우리가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야 할 일은 투쟁의 길이다”라고 연설을 마쳤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40년 전 민주구국선언에 대해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종교와 정치의 벽을 뛰어넘은 전대미문의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유신독재 시절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긴급조치에 맞서,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돼 민주화를 염원하던 지식인과 국민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또한, 테러방지법은 국가권력으로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했던 유신체제의 긴급조치와 본질이 같다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일어난 3.1운동과 그 정신을 계승한 3·1민주구국선언의 의미를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이어가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 교육장’이라 불린 민주구국선언
3·1 민주구국선언은 유신체제 하에 일어난 반정부선언이다. 유신독재에 의해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76년 재야정치인과 종교인 등은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57주년 기념미사에서 유신독재 체제를 비판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 긴급조치 철폐 ▲ 언론자유 보장 ▲ 사법권 독립 ▲ 부정·부패 척결 등을 주장했으며, 사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관련자 18명 모두에게 징역과 자격정지 2~5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천주교 신부로는 장소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함세웅 신부와 민주구국선언의 모태가 된 원주선언과 관련된 문정현, 신현봉 신부가 구속됐다.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대통령 한 명의 단순 명령으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통제할 수 있는 초헌법적 권한이다. 1975년 5월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일체의 주장이나 보도 행위를 영장 없이 체포·처벌할 수 있도록 해, 반유신세력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됐다.
전직 대통령과 야권 대통령 후보, 종교지도자와 교수 등이 피고인으로 참석한 재판과정은 ‘민주주의 교육장’이라 불리며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렸다. 국내에서는 긴급조치로 움츠러든 민주주의 운동이 다시 활력을 찾았고, 해외에서는 외신 보도를 통해 한국의 인권 실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또한, 당시 야권 지식인들을 한꺼번에 구속함으로써, 지식인들이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천주교와 개신교가 연대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남미 해방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70년대 민중신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3년 7월 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8부(이규진 부장판사)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과 관련한 16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36년 만에 내려진 무죄판결이었다. 재판부는 “대통령긴급조치법의 위헌성은 말씀드리기도 부끄러운 조치”라며 “뒤늦게나마 잘못을 바로잡아 판결하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안다”며 사과와 존경의 뜻을 밝힌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