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4일 월요일, 맑음
창밖으로는 멀리 지리산 하봉이 눈을 이고 내려다보고 있지만 그 아래 낮은 산자락들은 엷은 안개를 휘감고 있어 오늘 날씨가 따뜻하다고 미리 일러준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집집이 씨감자 담긴 찌그러진 양은그릇들을 옆에 끼고 동네 아짐들이 감자를 내고 있다. 이장네도 며칠 전 로타리 치고 비닐을 덮더니 오늘 감자를 심는다. 시골에서는 약속이라도 하듯 감자 심는 날도 캐는 날도 같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 감자씨가 얼기라도 하는 날엔 이 동네 올 감자 농사는 단체로 망한다.
이장네 감자밭
요즘은 날씨가 ‘하도 요상해서’ 농사도 잘 생각하고 일기를 참고해야 하는데 ‘옆집 이바구' 외에는 정보가 전무하니 이웃이 하면 그냥 따라서 하는 수밖에... 이런 식의 시골 농사도 이 세대가 끝나면 함께 끝이다. 이장네도 용산댁도 한남댁도 원기댁도 용수막댁도 부지런히 땅을 파고 씨를 묻으며 '보리고개 넘을 유월 장마 전‘(하지감자 캐는 날)을 기다린다.
어제는 동네 자가용들이 가득했다. 할매들 나이가 평균 80이다보니 밭을 갈고 멀칭을 하려 도시에서 자손들이 어머니 일손을 도우려 내려온 길이다. 아들이랑 며느리가 바람 한 번만 불어도 날아가게 엉성히 멀칭을 해놓고 가도 엄니들은 대견하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지금이야 부모 앞에 어리광부리듯 저런 밭일이라도 하지만 부모님들이 산자락 언덕으로 물러가 눕고나면 저 땅뙈기를 과연 누가 돌볼까?
11시에 광주로 길을 떠났다. 대교구평생교육원에서 개설한 ‘마리아 학교’가 보스코에게 개강 강의를 부탁하여 “마리아, 정의의 태양”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다. 광주는 보스코의 고향이어서 언제라도 가는 길이 맘 편하고 행복하다.
평생교육원 지하에는 바오로 딸 카페와 서원이 있고 그 옆에는 ‘현(玄)갤러리’가 있다. 수녀님들은 우릴 반기며 커피를 내 주신다. 옆 화랑에는 어느 부부가 전시를 하는데 남편 장재열 선생은 ‘순창 장날’을 찍은 60년대 사진들을, 부인은 닥종이로 ‘최후의 만찬’, ‘피에타’등 가톨릭 신자에게 눈 익은 인물상과 ‘염전의 일꾼’들을 전시했다.
순창 장날의 주막 ↑ 풍경과 예수님의 최후만찬 ↓
저녁 7시 30분에 ‘사순절 음악회’가 평생교육원 강당에서 있다는 초대가 와서 그 짬을 내서 우리가 열독하는 월간지 ‘전라도 닷컴’을 방문했다. 두암동 주택가에 있는 소박한 2층 건물을 사서. 빚은 졌지만 대인시장 낡은 건물에서의 추위는 면했다는 황풍년 편집장과 그 집의 두 대들보 남인희, 남신희 자매 기자 중 동생을 만났고 ‘사진쟁이’ 박갑철 기자, 영업과 광고를 담당하는 노한샘님도 만났다. 이 작은 숫자로 알찬 잡지를 만들어 주는 게 고마워 밥 한 끼라도 사고 싶던 차였다.
전라도 말씨와 맘씨, 풍물과 풍경을 달마다 잡지로 살려줘 고맙다는 치하에 오히려 ‘독자들이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니 정말 이 잡지사는 ‘되는 집안’이다. 황풍년 편집장은 당신이 쓴 「풍년 식탐」이란 책과 김도수님이 쓴 책 두 권을 선물로 주고, 남신희 기자는 애독자가 보내 왔다는 목련차와 차받침을 내게 선물로 나눠 주었다. 피가 통하는 인간관계는 책에서 뿐만 아니고 생활 속에서도 한결같다. 저녁을 함께 먹고 그 식구들의 휴천재 방문을 약속받고 헤어졌다.
7시 30분, 로마시절 한인성당에서 만났던 성악가 백정빈(모니카)씨의 "백정빈의 테마 음악회 1. 사순음악회 Stabat Mater"에 참석했다. 십자가 곁에서 비통하게 고통을 당하시고 눈물 흘리시는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아름다운 비애로 묘사한 Stabat Mater(십자가 아래 성모통고) 연창곡을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 (G.B. Pergolesi) 곡으로 들었다. 현악 사중주단의 반주로 백모니카씨의 소프라노, 전진씨의 메조소프라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엄숙하고도 거룩한 사순절 40분의 묵상이었다.
광주가톨릭대 총장 노신부님, 남재희 신부님, 살레시오 남신부님, 바오로회 관구장 황신부님, 신학교 1학년 학생들을 인솔하고 오신 안신부님도 인사를 나누었다. 신학생들은 보스코를 보자 "아, 그 라틴어!" 라고 비명을 올리는 걸 보니 보스코가 쓴 책으로 하는 라틴어 공부가 어지간히 고생스러운가 보다. 교회음악가 서행자수녀님, 내 친구 양수산나 선생, 요안나도 만났다.
9시가 넘어 음악회가 끝나고, 야간운전을 힘들어하는 밤눈이지만, 그나마 차가 드문 4차선을 얌전히 달려 휴천재에 돌아오니 밤 11시! 2400꼭지 다음 번호의 일기를 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