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6일 수요일, 맑음
아침기도를 올리는 중인데 지례 박신부님이 전화를 하셨다. 통영 계시던 집에서 어제 밤에 올라오셨는데 아무래도 난방을 켜놓은 채 온 듯해서 다시 가봐야 하니 봄바람 쐬러 같이 갈 생각 있느냐는 전화였다. 맛있는 복국도 들고 만개한 동백도 보자는 초대였다. 보스코는 분도출판사가 보내온 「아카데미아학파 반박」이라는 책자의 교정쇄를 들여다보는 참이어서 본인에게 물으면 안 가겠다 할 것 같아 내가 “좋죠!”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자기 사정을 몰라준다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피하면서 “여보, 올봄 동백은 한번쯤 봐야 하지 않겠어? ‘뚝! 떨어져서 피는 꽃, 동백이라 하던가요?’(김유철 시인)” 라는 내 말에 체념하는 표정으로 일어서는 보스코. 그를 혼자 두면 틀림없이 ‘도서관의 쥐’(‘방안퉁수’를 일컫는 서양말)가 되어 집밖을 한 번도 안 나설 게다.
"섬은 물위에 뜬 구름이다" (이생진)
동백은 섬을 지키기에 땀을 흘렸다
동백은 고독이 몰려와도 울지 않았다 (이생진)
생초 버스터미널에서 박신부님을 만나 신부님차로 통영을 향해 떠났다. 요즘은 아예 길에서 산다는 말을 들을 만큼 운전대에 오래오래 앉아있던 나로서는 모처럼 남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통영바다를 보니 가슴이 후련하다.
박신부님이 거처하는 아파트는 보일러가 얌전히 꺼져 있었다. 65세가 넘었으니 나에게도 ‘어르신‘이라는 노인증과 더불어 건망증이 기본이 됐다. 지난번에도 서울 가는 길에 “겨울이라도 그냥두면 상할 것 같으니 사골을 다시 끓여놓아야지.”라고서는 냄비를 올려놓은 채 그냥 가다가 금산휴게소서야 생각이 났다. 아차하며 진이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부엌은 굴뚝이고, 창문은 열어놨지만 사골냄새가 빠져나가려면 한 달은 걸릴 거라는 대답. 냄비가 다 닳고 그 열에 불이라도 붙으면 목조건물 식당을 홀랑 태우고 휴천재도 홀랑 태울 뻔한 건망증...
신부님네 아파트는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뒤에는 산이 있어 아늑하였다. 손수 차를 끓여 내오시고 보스코 발목 삔 데와 나와 보스코의 손목 접지른 데를 만져주신다. 어딜 가서 누구를 만나도 즉석물리치료를 해 주시다보면 당신은 밥은 굶지 않는단다. 작년 추석날도 모든 음식점이 닫혔지만 그 전날 밤에 노래방에서 만난 도우미가 발을 삐어 고생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만져주신 게 인연이 되어 추석날 푸짐한 아점을 얻어잡수셨단다.
박신부님은 이른 점심으로 가까운 ‘꽁보리밥’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셨다. 복국이나 요즘 제철이라는 ‘가자미쑥국’보다는 나물을 강된장에 비벼먹는 보리밥을 나는 더 좋아한다. 우리가 와 있는 섬이 미륵도라기에 ‘박경리공원’을 둘러보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지척이란다.
일주일 전 원주에서 보았던 분위기의 전시물을 ‘박경리기념관’에서 보고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 묘소를 참배하였다. 박신부님은 시옷자 생가지를 하나 꺼내 들고 무덤을 한 바퀴 돌면서 수맥이 열십자로 만나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자리는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데 공원 담당자는 그래서 명당중의 명당이라고 설명하더란다.
동란 중 어처구니없이 남편을 잃고 고향이라고 돌아와 젊은 연하의 총각교사에게서 평범한 여자로서의 행복을 얻었다 싶었는데 통영사람 전부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통영을 떠나버린 박경리 선생! 50년 뒤(2004년) 고향을 방문한 게 전부였지만 마지막 안식은 그래도 고향 양지 녘에 누워 바다를 내려다보며 영원을 누리고 있다. 올 봄 첫 진달래를 무덤 가까운 소나무 밭에서 보았다.
몇 해 전 한번 묵은 에이스콘도에 올라 통영바다를 내려다보고 해안을 돌고 돌며 남해의 잔잔한 물결을 구경하였다. 신부님은 미륵도에서 가장 맛있다는 커피집(‘안트워프’)에서 커피를 사시고, 집에 가서 먹으라며 갯가에서 멍게도 사주고, 통영으로 건너와 서화시장도 구경시켜 주셨다. 온 섬이 동백인데 그 붉은 꽃들은 죄다 잎사귀 틈에 숨어서 피는 게 조선반도 여자들의 가려진 삶의 품새 그대로다.
대전-통영 고속도로로 생초까지 와서 주차한 우리 차로 집에 돌아오니 저녁 6시. 이미 캄캄해진 텃밭으로 내려가 어제 이랑의 못다 심은 몇 뼘에 감자를 마저 심고 있으려니까 반달이 하늘에서 촉수 낮은 전등을 켜주면서 “엔간히 좀 하시지.”라면서 혀를 끌끌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