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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째 안 풀리는 하숙집 아줌마의 저주
  • 전순란
  • 등록 2016-03-23 11: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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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1일 월요일, 맑음


어제 덕촌댁이 한 자루나 준, 싹난 감자를 밤새 손질하였다. 어둔 창고 안에서 고것들이 땅속인 줄 알고 개당 순을 족히 열 개는 돋아내고 순마다 팥알만한 감자를 조랑조랑 매달고 있다. 마치 암탉을 잡아 배를 갈랐을 때에 그 암탉이 일평생 낳을 계란들이 크게는 500원짜리 동전 지름만큼에서 시작해서 작게는 좁쌀만한 것까지 한 줄로 들어 있듯이... 감자도 후손을 남기려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위대한 생명순환의 신비다.


덕촌댁이 가르쳐 준대로 순을 두어 개만 남기고 모조리 뜯어내고 긴 줄기 뿌리는 가위로 잘라서 준비를 하고나니까 커다란 고무양푼 하나의 분량이다. 그걸 들고 내려가 고랑에 주저앉으니 "저 긴 이랑을 언제 심나?"하는 생각과 "올 여름엔 그 많은 감자를 누가 먹나?" 걱정이 앞선다. 이번에는 본인이 와서 손수 캐갈 사람에게만 몇 뼘씩 분양해 주고 자기 손으로 캐가라고 할 참이다.



밭이랑에는 봄뜸 삼아 남겨두어 겨우내 하얗게 얼고 뿌리채 뽑혀 넘어진 배추 몇 폭이 있었는데 그것도 열어보니 속에 노랗고 맛있는 고갱이를 싱싱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맨 안쪽에는 장다리꽃 피워올릴 준비까지 마치고! 아아,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끈질김은 얼마나 가상하고 아름다운가!


점심상은 배추고갱이와 어제 얻은 봄나물들의 인심으로 푸짐하기만 하다. 일한만큼 돌려주는 게 땅이다. 아니다! 새끼손가락만한 모종, 눈에도 안 보이는 씨앗 하나를 심고 버려두다 시피하면 한 아름짜리 배추를 한 포기씩 되안겨주시는 이가 농부 하느님이시다!


점심후 보스코는 배나무 가지치기한 잔가지들을 베밭에서 주워 한 자리에 모았다. 저렇게 열씸히 해도 물까치 좋은 일만 시키는데... 내가 감자를 심던 이랑에도 두더지들이 강남 중심가 같은 대로와 미아리 달동네 같은 골목들을 얼마나 얼키설키 뚫어놓았는지 감자농사 역시 두더지 영감만 신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하지만 어쩌랴? 애당초 그것들과 재주껏 나눠먹으라는 것이 두더지도 물까치도 사람도 아울러 창조하신 분의 뜻인데....




할머니 생신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왔던 엽이 엄마에게서 물건을 전해받으러 읍으로 나갔다. 우리가 내려오면서 빠뜨리고 온 핸드폰 비상용 충전기와 은행 코드칩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길이다. 두 집을 오가면서 물건을 자주도 빠뜨리고 자주도 잊곤 한다. ‘빈둥’에서 정옥씨를 만났다. 얼굴에 “나 늙어서 공부했음!”이라고 적힐만큼 많이 지쳐보였다. 안쓰러우면서도 그나이에도 꿈을 이루려는 ‘인간승리’의 모습이 대견하고 고맙다.


자동차의 후진센서 셋 중 두 개가 망가져서 ‘스피드메이트’에 맡기고 두어 시간 상림을 걸었다. 저녁나절이어서 인적이 끊기고 냇가에는 물오리와 원앙이 떼로 노닐고 서늘한 봄바람이 빈나뭇가지를 흔들어 깨우는 숲길이다. 보름으로 몸을 불린 온달이 나만큼 한가로이 가지에 결려 있다.


산길을 돌고 돌아 집으로 오면서 보니 면사무소 앞 화단에 심겨진 팬지가 바람에 잎을 떨고 있다. 낮에 그 앞을 지날 땐 우리 동네 드물댁이 그 화단에서 꽃을 심고 있었다. 그니를 부르려니 얼른 돌아앉는 품이 부끄러움인지 날 못본 것인지 궁금하다.




아짐들마다 오리궁둥이를 달고 편히 앉아 꽃을 심는데 드물댁만 (더구나 무릎이 안 좋은 터에) 맨궁둥이로 일하는 중이어서 읍에 나간 길에 오리궁둥이 셋을 샀다. 하난 태우할머니, 하난 한길가 아짐, 하난 드물댁 거다. 시골아짐들은 이런 거 하나 사는데도 여러번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도 장에 나가는 차편도 어렵고, 남에게 사다 달라 부탁하기도 여의치 않다.


밤에는 내일 밀양에 싸갈 음식 장만에 들어갔다. “다시는 아내에게 출장부페를 시키지 않겠습니다!”는 입바른 맹세로 얼버무리는 저 남자는 집에 오는 손님 대접만으로 성에 안 차는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지.... “선상님은 새댁을 몽씬 사랑해줄 거요. 그런데 손님들 불러다 죽도록 고생시킬 거요.” 결혼 전 반년 동안 보스코가 하숙한 주인집 아줌마의 저주가 44년째 아직도 안 풀리고 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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