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4일 수요일, 맑음
‘임실양반’은 보스코보다 한 살이 많다. 그래도 또래라고 이 마을에서 보스코에게 살갑게 대하며 더구나 사위가 외교관이어서 보스코의 사회적 신분을 각별히 존중하는 노인이다. 십수년전 뇌졸중으로 뇌수술을 받은 뒤 공직생활을 떠났고 걷기도 말도 어눌해져 지팡일 짚고 산보를 하다 내가 지나가면 내 차를 세우고 “순천 박람회에 같이 가자”, “인월 어탕집에 같이 가자”는 초대도 했었다. 이 시골에서 아낙에게 먼저 인사와 말을 거는 유일한 신사다.
하루는 차를 세우더니 “교수님 안 계시는데 어딜 가시나, 혼자?” 라고 묻더니 “장독 하나 사러 산청갑니다”라는 대답에 장독은 당신이 잘 볼 줄 안다면서 함께 가잔다. 동네에서 여성에게 친절할 줄 아는 유일한 남성이다. 다만 시골에서 남편 없이 이웃 남정을 싣고 다니면 “교수댁 정분났다”고 소문나기 십상이라 “독을 사고 여기저기 들려야 하니 담에 모시고 갈게요”라고 에둘러야 했다.
그런 사람이 겨우내 안 보이기에 전화를 걸었더니 병원(서울 아산)에 있다면서 “답답해서 집에 다니러 갈 테니 기다리시오.”라는 희미한 대답. 드디어 오늘 보스코랑 문병 차 찾아가니 스치는 바람에도 날아갈 듯 크게 쇠약해 있다.
아내 임실댁은 오로지 착하고 충성스럽기만 한 여인. 평소에도 “큰병(뇌졸증)도 이겨내서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고맙다”며 농사며 집안일을 도맡고 남편을 하늘같이 위하던 참인데 “이번엔 정말 나쁜 병에 걸려뿌렀소. 난 벌써 마음을 접었어요. 그래도 살아있을 때까진, 이미 덤으로 얻은 인생이라서 감사할 뿐”이란다. 자연과 가까운 삶은 자연의 이치에 순하게 순응하게 만든다.
오늘은 남편의 친구가 목사인 자기 제랑을 데리고 문병 와서 안수기도를 해주고 갔단다. 환자가 내심으로 이미 ‘치병’에서 ‘의탁’의 경지로 넘어서고 있음을 나타내며 작은아들네가 성당을 다니니까 남편도 성당 믿다가 갔으면 좋겠다는 뜻도 비친다.
호스피스 활동을 해온 보스코가 환자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손을 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한 마디를 하는데도 온 몸의 기운을 긁어모아야 하더란다. 오늘 아들이 와서 자고 내일 아침 서울로 데려가 두 번의 수혈과 다섯 번의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기에 보스코도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방을 나왔다. 아픈 이들과는 짧은 만남이 자칫 영이별인 수가 많다.
이미 고비를 넘겨버린 병세에 항암치료는 명만 재촉할 뿐이라는 보스코의 한탄... 도정에 온 여교우도 항암치료 한번 받을 적마다 현저히 상태가 악화되는 게 보여 치료를 거부하고 호스피스 봉사를 받아들일만했건만 의사에게 매달리다 서둘러 떠나버린 게 벌써 세 해 전이다.
오히려 40대 여인은 항암치료 한번 받고서는 “이건 아니다!”면서 살아있는 동안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자유롭게 살다 가고 싶다면서 이곳에 내려와 시골의 휴양생활로 바꾸더니만 나이든 여교우보다 훨씬 오래, 훨씬 밝은 얼굴로 살다 갔다.
오늘 저녁기도를 바치면서 보스코와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암이 발생하면 수술과 항암치료를 일체 않고 자연 그대로 살다 떠나자고... 옛날 같으면 우리 모두 북망산천에서 눈 이불 덮고서 잠들 나이들인데...
오늘은 참 오랜만에 호미를 잡았다. 휴천재 올라오는 길에 잡초를 한나절 뽑고, 소담정 도미니카가 얻어다 준 팬지를 식당 앞 나무화분에 심었다. 보스코는 점심 후 안마당 데크밑의 잡초를 뽑느라 호미질을 했다.
드물댁이 이장네 부추밭에 호미질을 하고 있어 우리 부추밭도 매달랬더니만 부지런하고 잽싼 호미질로 양파밭 고랑이랑 섬초롱, 신선초, 박하와 방풍, 참나물이 조금씩 심겨진 밭까지 몽땅 매고 갔다. 도회지 딸네집(아파트)을 가도 “이 구멍이 저 구멍 같아” 집 찾기마저 힘들다며 오늘처럼 “놈의 집 풀을 매도 여그가 좋은 기라.”며 행복해 한다.
한 나절씩 풀을 맸더니 내 삭신이 여간 쑤시는 게 겨우내 잘 놀았다는 신호다. 보스코는 ‘임실양반’ 병문안을 다녀와선지 힘이 없다. 벗이며 이웃을 하나씩 떠나보내는 일은 다음은 내 차례라는 안내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