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5일 월요일, 맑음
오랜만에 천왕봉 하봉이 바라보인다. 서울이야 자동차와 매연, 인간과 오염에 온 세상이 탁하지만 지리산에서도 오늘처럼 먼 산까지 올려다 보이면 저절로 손길과 발길이 바빠진다. 아래층에 내려가 어제 꼭지를 따서 설탕에 절여 놓은 딸기를 끓이기 시작했다. 누가 먹지도 않고 좋아 하지도 않는 잼을 그래도 철철이 만드는 건 여자에게 길들여진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다. 또 다기능으로 태어난 여자이기에 손으로는 쨈을 젓고, 눈으로는 앞산에 송화가루가 노랗게 날리는 걸 보며, 귀로는 스피커폰을 켜놓고서 동생과 전화를 한다.
늙을 대로 늙어서도 자식새끼에게 꼼짝 못하는 사람을 보면 속이 답답하다. 자식이 힘들다고 우는 소릴 하는데, 곧 갚겠다는데 차마 외면을 못해 있는 재산 탈탈 털어 주며 “이게 전부다, 빠른 시일에 꼭 갚아라!” 라며 건네주고는 더는 돈도 자식얼굴도 구경 못하는 한심한 사람들이 우리를 속 터지게 만든다.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재산을 자식에게 다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상식을 어기고 나면 자기 권리와 여생과 품위까지 몽땅 내던지고 엉뚱하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짐짝이 되며 속상하게 만든다.
사업한다며, 살림 힘들다며 어머니의 양로원 보증금까지 털어가는 자식이라면 치매 걸리고 중풍 든 어머니를 돌볼 턱이 없다. “‘오로지 내새끼!’라며 키운 자식은 절대로 효도하지 않는다!”는 게 주변의 노인들에게서 지켜보고 배운 학습이다.
지난 가을 실비아 수녀님이랑 우리 김장을 도우러 왔던 데레사 씨가 한 여인(수산나)을 데리고 휴천재에 들렀다. 몸이 안 좋아 지병이 들면 사람은 산을 찾아와 포근하고 넉넉한 자연의 품에 안기고 싶어진다. 그렇게 해서 기운을 되찾아 이 골짜기에 싱싱하게 뿌리내린 사람들도 있고, 좀 나아졌다고 좋아라며 도회지로 돌아가 전과 같은 생활을 하다 병이 도져 돌아오기도 하는데 자연은 기회를 두 번 주지 않는 것 같다.
여하튼 건강도 재물도, 학식과 명예도 나에게 잠깐 맡겨지는 것이어서 고스란히 다 내려놓고 떠난다는 진리를 깨달으면 병고와 역경 앞에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긴 하겠지. 한 알 밖에 없는 눈깔사탕은 우리 어린 시절, 얼마나 아껴가며 얼마나 달게 빨아먹었던가!
데레사 씨가 실상사 앞 추어탕 집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보스코는 속이 불편하다 해서 나만 갔다. 식사 후 우리 세 여자는 실상사를 둘러 보러갔다. 절 입구 기념품 가게도 경내로 넘어가는 길도 텅 비었다.
실상사는 세월호를 간직하고 있다
요 며칠 돌아본 절들이나 사당들이 모두 고래등같은 위용을 갖추고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데 비해 실상사의 모든 건물을 초라하리만큼 소박하다. 크게 불사를 일으킬 능력이 얼마든지 있는 스님들인데도 귀농하는 젊은이들에게 농사를 실습시키고 ‘인드라망’ 공동체를 이뤄주고, “세월호 천일기도”를 개최하여 불자들에게 중생에 대한 자비를 가르치는데 노력을 집중하는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실상사는 한국 불교 사회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람이 살아있는 부처임을 알고 섬기는 곳이기에 그곳에 가면 언제라도 인간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든다. 절이든 성당이든 교회든 사람(곧 하느님)을 섬기거나 재물을 섬기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 못하는 법이다. 그래선지 실상사 석탑이나 극락전의 목조 아미타불, 특히 철조약사불은 언제 봐도 그 눈빛과 미소가 친근하다.
어제 전화로 예냉고 설치하라면서 견적 내러 사람이 왔다는 보스코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집에 갔다. 시골에 살고 농산물을 거두다 보면 상하지 않게 보관할 게 너무 많아 예냉고를 설치들 하는데 그 남자 설명을 두어 시간 듣고 나서 그냥 지금 있는 냉장고를 이용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라 경제도 세계경제도 크게 휘청거려 사람마다 지갑을 닫고서 닥쳐올 불황에 대비한다나. 저 산비탈의 녹음처럼 자연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되살아나지만 인간세계는 그러질 못한다.
빵기가 4월말에 제네바 앞산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고 사진을 찍어 보냈고, 빵고는 어렸을 적에 봬온 파리나 추기경님을 만났다고 사진 한 장을 보내 왔다. 알프스 마리오도 산마르티노의 봄 풍경을 사진으로 보내왔다.
파리나 추기경님은 빵고가 두살적부터 봬온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