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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그냥 사랑이라서 사랑한다. 그것이 전부다.
  • 유대칠
  • 등록 2016-05-05 10:4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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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그 말이 두렵다. 그러나 마지막은 올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언젠가 더 이상 어머니의 김치를 먹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김치를 먹게 될 것이다. 그저 조금 맛만 보아도 어머니의 손맛을 알 수 있는 그 김치는 나의 일부다. 내 몸의 하나가 되어 내가 지금에 왔듯이, 내 혼의 일부가 되어 지금 이렇게 있다.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모르던 나는 김치가 부끄러웠다. 쓸쓸하게 홀로 담긴 도시락의 김치가 부끄러웠다. 왠지 어린 마음에 가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듯해서 싫었다. 부끄러웠다. 참 못된 놈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늦은 저녁 홀로 먹는 식사에 어머니의 김치를 마주한다. 눈물이 난다. 목이 멘다. 그 시절 김치는 나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이었다. 고마웠다. 너무 미안했다. 마지막. 이젠 그 말이 두렵다. 무섭다. 


어머니의 사랑은 게으르지 않다. 쉬지도 않는다. 당신의 두 다리를 모두 수술하고 퇴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다친 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떠나지 않았다. 내 아픈 모습이 어머니의 힘든 아픔보다 더 아프셨다. 혹시나 내가 외로이 홀로 아플까 이런 저런 사정을 따져 묻지도 않고 내 아픔만 보셨다. 그 아픔을 나누셨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렇게 게으르지도 쉬지도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이 더 두렵다. 더 무섭다.


중동 가자 지구의 비극이 떠오른다. 사지(四肢)가 찧어진 보기 힘든 죽은 몸의 아이를 안고 울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았다. 입 맞추며 놓아주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다른 이의 눈에는 가까이 하기 힘든 모습이지만, 부모의 눈엔 아이의 아픔만이 보였다. 같이 아픔을 나눌 수 없는 현실만이 보였다. 놓아주지 못하고 입을 맞춘다. 부모의 사랑이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그런 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세월호의 비극이 떠오른다. 가습기 살균제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죽었다. 이 사회의 탁함에 빠져 자식이 죽였다.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남겨진 부모의 그 죽을 듯한 아픔은 덜 해지지 않는다. 그냥 그 아픔이 오롯이 자신의 존재가 된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슬퍼하며 있다는 말이 된다. 부모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 2월 27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모인 4차 민중총궐기가 열렸다. ⓒ 최진


부모의 사랑은 게으르지 않다. 무엇을 바라는 사랑도 아니다. 어떤 다른 사심도 없이 그냥 자식의 미소가 자신의 미소가 되는 그런 사랑이다. 그냥 사랑해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다. 그것이 전부다. 어떤 이유도 없이 이루어진 사랑이기에 어떤 이유로도 멈추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무엇을 바라는 마음에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기에 무엇을 준다고 끝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게 부모의 사랑이다. 어머니의 김치가 내가 되었듯이 그렇게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이 자식이 된다. 자식의 존재는 그렇게 부모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 그 사랑이 그러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 많은 돈을 가져다주면, 더 큰 사랑을 주는 그러한 하느님이 아니다. 가진 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살 수 없다. 하느님은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우리라서 사랑한다. 그냥 사랑하기에 사랑한다. 


어린 내가 김치를 부끄러워했듯이 그 김치가 무엇인지 온전히 몰랐듯이 그렇게 우린 하느님의 그 사랑을 잘 모른다. 눈에 보이는 큰 집과 권력을 주지도 않는 사랑이라 그 큰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조롱해 버린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며, 사랑도 눈에 보이는 무엇으로 나타내 보이라며 조롱한다. 참 나쁘다. 내 어린 시절 내가 어머니의 김치를 몰라 부끄러워했듯이 말이다.


요즘은 무엇이든 대가(代價)가 있어야 한다. “너가 잘하면 나도 잘 해준다”는 식의 사랑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것은 하나도 내어 놓지 않는다. 아깝다. 그가 무엇을 내어 놓으면 고민고민해서 그와 같은 가치의 무엇을 하나 내어놓는다. 손해날까 손을 떨면서 말이다. 사랑이 아니다. 순수한 사랑이 사라진 세상에 대가 없는 사랑은 없다. 모든 사랑은 대가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가를 돈이니 이런 저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루면 그만이라 생각한다. 세월호 비극을 보자. 어떤 대가를 치러도 달라지지 않는다. 기억해야 한다. 부모의 사랑 그리고 참으로 순수한 사랑은 대가 없는 사랑이다. 이유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러도 어떤 이유에서도 멈추어 서지 않는 사랑이다. 


나자렛의 베아트리체(Beatrice of Nazareth, ?-1268)가 생각난다. 베아트리체에게 하느님은 사랑이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사랑이다. 그것도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나 이유가 있는 사랑이 아니다. 그냥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사랑이다.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이고 수단이며, 이유이고 결실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다른 대가도 없다.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영혼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우리 주님께 봉사하길 원할 때이지요. 오직 사랑이란 이유 하나로 말입니다. 은총과 영광의 보상 없이 사랑의 어떤 이유를 알려하지도 않고 말이지요.” (「성스러운 사랑의 일곱 길」 중 발췌 번역)


베아트리체에게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은 사랑이다. 많은 중세의 여인들이 그러하듯이 인간 가운데 가장 성스럽고 순수한 것, 인간 가운데 가장 신적인 것은 사랑의 마음이다.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둔 이 사랑으로 우린 어떤 사심 없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보상이나 대가 없이 말이다. 사랑 앞에서 계산하지 않는다. 혹시 이 사랑이 나에게 더 이익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는다. 그의 행복과 성공이 내 웃음의 이유가 되고, 그 웃음이 다시 그의 행복과 성공이 되는 것이 사랑이다. 서로의 기쁨과 분노를 남의 것이라 고개 돌리지 않고, 그 앞에서 무엇이 이득인지 계산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베아트리체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가진 자의 큰 소유함에 매력을 느끼는 그러한 사랑이 아니다. 혹시 외로이 울며 아파하는 이의 눈물, 더 힘든 이의 눈물 앞에서 오히려 무엇도 바라지 않고 더 사랑한다. 더 채울 곳이 많은 더 힘들고 더 아픈 이를 더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다. 가진 자의 소유물이란 대가를 바라고 계산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의 손에 계산기가 없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아야 한다. 베아트리체는 하느님을 천국 열차에 올라타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고 경고한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미래 사후 세계에 주어진 자기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고한다. 하느님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하느님을 이 정도 사랑하니 하느님도 어느 정도의 결과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사랑, 하느님을 이용하는 사랑은 안 된다. 이러한 계산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이 앞에서 우린 계산기를 들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계산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그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그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 하느님도 우리에게 은총을 주신다. 물론 이 은총은 큰 재산이나 집이나 권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무엇이 아니지만 내려지는 은총이다.


나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내 어머니의 김치 같다. 유명 요리사의 값비싼 요리가 아니다. 무엇인가 화려한 것으로 포장된 그런 요리가 아니다. 하지만 날 위해 게으르지 않은 희생이며 나의 작은 아픔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어머님의 사랑과 같다. 그렇게 쉬지도 않으며 대가를 바라지도 어떤 이유로 인해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냥 사랑해서 사랑하는 사랑이다. 대가를 바라지도 이유도 없이 시작된 이 사랑은 어떤 대가로도 막을 수 없고 어떤 이유로도 막을 수 없다. 그냥 사랑해서 하는 사랑이니까 말이다.


베아트리체가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순수한 사랑, 그리고 어머니의 김치. 내 손에 들린 계산기. 나는 오늘도 부끄럽기만 하다.



[필진정보]
유대칠 : 중세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는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중이다. 현재 대구에서 오캄연구소를 만들어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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