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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부끄러움, 희망은 거기에 있다.
  • 유대칠
  • 등록 2016-03-18 11:06:37
  • 수정 2016-03-18 11: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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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 바람이 부는 것은 당연하다. 하늘의 푸르름이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자연스럽다. 그저 당연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 당연함 앞에 부끄러울 때가 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할 때다. 윤동주는 그래서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자신이 부끄럽고 시대가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조선 사람이 조선어를 익히지 못하고 조선 역사를 공부하지 못하고 조선 문화를 말하지 못하는 그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조선 사람이면 당연한 것 앞에서 초라하게 그 당연함을 당연하게 누리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부끄러움은 도덕적 자아를 등장케 한다. 무엇이 바른 길인지 안다면, 부끄러움은 실천 없는 그 도덕적 자아를 흔든다. 부끄럽지 말라며 흔든다. 흔들리던 자아는 자기 가운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욱 더 분명하게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이리 보면 부끄러움은 도덕적 선(善)의 희망이다. 그 당연함이 무시되는 곳에서 어떤 부끄러움도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 선의 절망이다. 진실을 보고도 침묵하는 언론도, 국민을 위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권에 눈이 먼 권력도 모두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절망이다. 부끄러움조차 없다면 절망이다. 부끄러워야한다. 


윤동주의 <서시>가 생각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움 앞에 선 동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험한 길을 담담히 걸어간다.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그 당연한 길을 당연히 걸어간다. 당연함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 미완의 청춘 29살 동주는 영원한 청춘이 된다. 늙지 않는 영원한 청춘이 된다. 그의 벗 문익환은 동주를 그리워한다.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 문익환의 <동주야> 중


영원한 젊음, 늙지 않아 다행인 미완의 청춘, 너무나 맑은 동주는 그렇게 스스로가 하늘이 된다. 그를 보고 있으면 우리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그런 하늘이 된다. 너무나 푸르고 맑은 하늘이 된다. 문익환은 너무나 맑은 그 동주를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도 맑아진다 했다. 



난 나는 지금 그의 추억을 쓴다. 그의 추억을 쓰는 것으로 나의 인생은 맑아진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깨끗했던 것이다.


- 문익환의 <동주 형의 추억> 중 


‘당연함’이 무시되는 흐린 이 세상에 너무나 맑은 동주는 어울리지 않은 것일까? 늙지 않은 청춘에게 이 세상은 허락되지 않은 곳일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겠다던 동주는 스스로 하늘이 된다. 


14세기 중세 영국 역시 당연함이 당연함이지 않았다. 계속된 흉년과 극심한 전염병으로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죽어갈 때, 당연히 그들을 안고 함께 울어야 할 교회는 그리 하지 않았다. 노리치의 주교 헨리 디스펜서는 세례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가난한 이들의 자녀를 위해 함께 울기보다, 그 부모에게 면죄부를 팔았다. 당연함이 무시되는 세상을 향한 가난한 이의 외침에 대해선 무력으로 진압해버리기도 했다.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 그저 먼 이야기였다. 당시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인 위클리프는 이러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냥 있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당연함이 어색해진 시대, 모두가 부끄러워하거나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더러는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저 세상이 그런 것이기에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슬프게도 많은 지식이 그러했다. 14세기 영국 역시 다르지 않았다.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은 분노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사랑이라며 결국 이 세상의 이 어지러움도 다 잘 마무리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긍정주의 속에 살았다.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분노할 필요 없다 보았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선하시다. 그러니 결국 선한 하느님의 사랑에 따라 모든 것은 잘 마무리 될 것이다. 이것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신앙으로 믿으면 굳이 분노하며 부당함 앞에 소리치지 않아도 된다. 울부짖지 않아도 된다. 


잘 될 겁니다. 잘 될 겁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겁니다.


지금 인간의 눈엔 어느 것은 선하고 어느 것은 악하지만, 하느님의 눈엔 그렇지 않다. 결국 모든 것은 다 선을 이루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저 인간만이 선하다 악하다 할 뿐이다. 


인간들은 어떤 일을 잘 되었다고 판단하고 어떤 것을 악하다 판단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리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자연의 품에 모든 것은 신의 창조물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행해진 모든 것은 하느님이 행한 것이란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 노리치의 줄리안의 ‘하느님의 창조’


하느님이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저 잘 될 것이란 믿음은 매우 소극적인 신앙이다. 행동하지 않고 기다리는 신앙은 참으로 소극적이다. 과연 이러한 소극적인 신앙, 기다리는 신앙이 참된 신앙일까? 병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가난한 이들의 아픔 앞에서! 당장 죽어가는 이들이 보이는 그 잔혹한 슬픔 앞에서! 그저 기다리는 신앙이 참으로 하느님이 원하는 신앙일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우리도 그 아픔을 안아주길 바라고 있으신 것은 아닐까? 움직이는 신앙을 바라고 있으신 것은 아닐까?


같은 시대 같은 곳에 또 한 명의 여인이 있다. 최초의 영어 자서전을 쓴 마저리 캠프(Margery Kempe)다. 그녀는 자신을 ‘괴상하고 조화롭지 못한 인간’이라 묘사한다. 사실 그녀는 줄리안과 같이 조리 있게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지 못했다. 매우 감성적이고 큰 소리로 울며 자신의 초라함과 시대를 슬퍼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14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다. 남편의 마지막을 함께 한 아내이다. 


부유한 이의 딸로 태어나 살았으며, 비록 실패했지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맥주 제조업을 하기도 했다. 제분소를 다시 시작하지만 이 역시 실패했다. 그리고 당시로는 어려운 성지 순례를 하기도 했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 손을 물어뜯기도 하였다. 앞서 소개한 노리치의 줄리안을 만나기도 했다. 


줄리안과 달리, 교회를 향하여 분노하며 소리쳤다, 이런 그녀에게 교회와 권력자는 이단이라 했다. ‘거짓 창녀’라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폭행을 저질렀다. 정말 창녀인지 증명하겠다며 강간하려 하기도 했다. 이러한 협박에도 고개 숙이지 않은 그녀를 향하여 참으로 선하거나 참으로 악한 여인이란 말도 되지 않은 결론으로 내렸다. 무죄라 하지도 않았다. 부끄러운 행동을 사죄하지도 않았다. 당시 박식한 이들 역시 그 용기를 지지하기보다 이단이라며 시험하였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마저리 캠프는 줄리안을 만나 하느님이 사랑이란 사실을 전해 듣는다.


“성령은 결국 자비와 대립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했다면, 그는 그 자신에 맞서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비 그 자체이니 말입니다. 또한 그는 영혼을 순결함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결한 삶이 성령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영혼을 바른 신앙과 바른 믿음으로 단단히 붙잡아두시기 때문입니다.”


- 마저리 켐프의 줄리안에 대한 기억


마저리 켐프는 줄리안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신의 반지에 Jesus est amor meus, 즉 “예수님은 나의 사랑이시다”라는 글귀를 새겼다. 항상 이 말을 마음에 담고 삶으로 드러냈다. 그녀에게 이 말은 단지 지식이 아닌 삶이 되어야 하는 말이었다. 



마저리 켐프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았다, 직접 가난한 이들의 삶을 보면서 마저리 캠프의 부끄러움은 깊어졌다. 하느님의 사랑은 저리도 높은데 온전하게 그 사랑조차 체험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민중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등 돌리고 있는 교회의 태도에 눈물이 났다. 부끄러워하지 않은 교회의 그 뻔뻔함에 분노했다. 현실의 아픔에 고개 돌린 교회의 그 뻔뻔함 앞에 울었다. 큰 소리로 울었다. 


여인이여, 왜 그리 울고 있소? 

나는 이리 답했다. 주교님, 당신도 언젠가 내가 지금 울듯이 그렇게 울게 되길 바랍니다.


- 마저리 켐


부끄러움을 모르는 교회를 향하여 마저리 캠프는 교회도 성직자도 수도자도 울어야 한다 답했다. 당연함이 당연함으로 있지 않은 이 현실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울어야 한다고 했다.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했다. 부끄러워하라고 했다. 


“그 후 주교는 나를 불렀다. ‘저는 당신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보고 받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참으로 사악한 여인이라 들었소.’ 


나는 이리 답했다. ‘저는 당신이 사악한 인간이라 들었습니다. 주교님. 그리고 만일 당신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사악한 인간이라면, 당신 스스로 당신의 길을 달리하지 않는 이상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을 겁니다.’


그 후 그는 협박하듯 내게 소리쳤다. ‘무엇이! 너! 사람들이 도대체 날 두고 무엇이라고 하더냐!’”


- 마저리 켐프


그녀는 당당했다. 부끄러운 일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스스로의 악행을 알라고 소리쳤다. 하느님의 사랑 뒤에 숨지 말고,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그 무책임한 긍정에 숨지 말고 부끄러워하라 소리쳤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선 그저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랑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며 부끄러워할 때, 그리고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사랑이다. 그저 기다리는 신앙이라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안아주지 못하는 삶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적어도 부끄러워해야 한다.


누군가는 세월호의 비극을 두고 만일 그 가운데 권력자와 부유한 자가 타고 있었다면, 저리 되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라면서 말이다. 마치 그러한 세상이 당연하단 식으로 말이다. 돈이 없어 온전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의 고통 앞에서도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누가 배에 타든 돈이 있든 없든 죽거나 고통스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며 부당한 권력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히 정치인은 국민을 생각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히 종교는 가난하고 힘든 이의 편에 서야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절망이다. 절망스러운 국가이고 정치이고 언론이고 종교이다. 


윤동주도 마저리 켐프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담담히 갔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말이다. 그리고 이 둘은 영원한 청춘, 고개 숙이지도 고개 돌리지도 않는 영원한 청춘이 되었다. 


부끄럽다. 여전히 당연함이 무시되는 현실 앞에서 고개 숙이고 있으니 말이다. 



[필진정보]
유대칠 : 중세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는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중이다. 현재 대구에서 오캄연구소를 만들어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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