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유대칠) 철학의 독립 운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유대칠
  • 등록 2016-05-30 10:21:10

기사수정


철학과가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는다. 슬픔 없는 죽음 앞에서 나 역시 담담하다. 슬픔 보다는 그저 담담하다. 


광복 이후 김구는 참된 조선의 독립은 한국철학이 우리 앞에 놓여지는 날 마무리된다 했다. 함석헌 역시 참다운 독립을 위해 한국철학이 필요하다 했다. 그것으로 우린 참된 의미에서 두 발로 독립되어 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철학은 먼 이야기다. 오히려 철학과는 문을 닫고 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그런 죽음이다. 한국철학은 여전히 없고, 철학과는 문을 닫고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네 현실이다. 


김구가 생각한 한국철학은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존재하게 하는 철학, 즉,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하나의 사고 틀이다. 그것은 우리 밖의 남을 공격하고 배격하자는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식민지를 통하여 잃어버린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우리 철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즉,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 줄 그런 우리만의 사고 틀, 우리의 주체성을 회복시켜줄 그러한 사고의 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오랜 시간 식민지 조선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적어도 조선은 강성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옆에서 조선성리학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이어갔다. 스스로의 사회적 문제를 스스로의 생각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500년 조선의 생명을 이어갔다. 조선이란 시간을 채우고 있는 그 수많은 모습들이 조선성리학으로 가능했다. ‘충’(忠)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이념 아래 ‘이순신’과 같은 명장(名將)이 가능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김정희’와 ‘허목’의 뛰어난 서체 역시 조선성리학, 크게 조선유학이란 이론적 배경에서 가능했다. 수많은 독립운동 역시 조선성리학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선비들의 붓으로 세워진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칼로 무장한 일본과 욕심으로 가득한 배신자들에 의하여 무너졌지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크고 작은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의 철학으로 스스로를 500년 살았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중국과도 일본과도 다른 조선성리학이 있었고, 이에 따라 다른 나라와 다른 조선만의 미학(美學)과 사상이 가능했다. 이런 조선은 스스로 사고하고 결단했다. 절대 노예가 아니었다. 


노예는 스스로의 철학으로 결단하지 않는다. 주인의 말을 따를 뿐이다. 노예의 주체는 노예 자신의 이성이 아니다. 주인의 명령, 즉 타자다. 다시 말해, 노예의 주체는 자신이 아닌 타자다. 그런 의미에서 노예란 자신의 주체가 타자가 되어 버린 존재,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없는 존재, 타자에 의하여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존재일 뿐이다. 자기 삶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타자의 눈으로 보게 되는 존재일 뿐이게 된다. 이런 노예에겐 철학이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철학이 없다.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주고, 우리 자신을 우리의 눈으로 볼 우리의 철학, 한국철학이 없다. 아직도 우린 철학적 식민지다. 


요즘 외국에서 유명 철학자가 한국을 찾는다. 그들에게 이 땅의 아픔을 묻는다. 당연히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한국의 아픔을 모른다. 그들에게 한국은 타국일 뿐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우리’가 아니다. 그런 이들이 한국의 아픔을 모르고, 한국인이 경험하는 정신적 고통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들에게서 한국을 향한 깊은 철학적 시선과 해법을 얻으려 한다. 과연 이 땅의 철학, 한국철학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노예가 주인에게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 것인지 질문하듯이, 그렇게 철학없는 우리는 타국의 철학자에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묻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아직도 우린 철학적 식민지다. 


들뢰즈의 철학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는 지금 우리의 아픔을 모른다. 하이데거와 니체 그리고 칸트와 헤겔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들은 지금 우리의 아픔을 모른다. 그들의 철학을 안다는 것은 그저 그들의 철학을 안다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철학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저 외국의 철학에 대한 지식을 하나 늘이는 것 뿐이다. 우린 한국철학이 필요하다. 들뢰즈와 노자 그리고 니체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활용해서라도 그리고 윤동주와 김구 그리고 함석헌이란 이 땅을 살아간 이들의 깊고 치열한 궁리함을 안고서 한국철학을 만들어야 한다. 


외국의 철학을 소비만 하는 행위가 한국철학이 만들 수 없다. 한국철학은 생산적이어야 한다. 철학의 산물은 그 시간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아픔에 대한 위안이다. 위안(慰安)이 되는 그 무엇을 생산해야 한다. 삶의 힘겨움에 쓰려진 교부 보에티우스에게 그의 시대 그의 철학이 위안이 되었듯이, 그렇게 한국철학은 지금 우리의 위안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생각과 아픔에 대한 대안 등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땅의 철학은 이 땅의 고민에 공감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철학이어야 한다. 함께 울지 않는 철학이 그 눈물에 대한 위안과 대안을 내어놓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함께 울며 그 눈물 가운데 우리를 우리로 더불어 품게 하고, 그 가운데 우리의 눈물에 대한 대안와 위안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런데 우린 이런 철학이 없다. 우리 모두를 우리 모두로 만들 우리의 생각 틀이 없다. 우리 가운데 함께 울며 우리를 위로한 그런 생각 틀이 없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하나가 되고 싶고 여전히 위로를 받고 싶다. 우린 여전히 노예의 상태다. 스스로 철학을 가지고 우리란 생명을 지탱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의 권위에 의존하고 외국의 오랜 과거 철학에 우리의 미래를 건다. 외국의 그 오랜 남의 철학에게서 지금 우리의 위안을 얻어려 한다. 스스로의 생각으로 존재할 수도 없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는 우리, 우리 철학이 없는 우리 불쌍하다. 아직도 우리 철학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슬픈 현실이다. 


함석헌을 생각한다. 그는 한국철학의 주요성을 절감했다. 생각의 독립, 즉 독자적인 철학은 그 자체로 ‘우리’라는 ‘존재의 원리’다. ‘자존’(自存)의 원리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철학이다. 이러한 우리의 철학은 우리 자유의 근본이다. 스스로의 고유한 생각 없이 혹은 스스로의 고유한 존재성 없이 어떻게 참다운 자유가 가능할 것인가. 이러한 자존과 자유는 온전한 생명, 독립된 생명의 시작이며 원리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외부의 폭력만을 탓할 수 없다. 그것은 불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죄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남을 업신 여긴 그들도 나쁜 죄인이지만, 스스로의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업신 여기는 것 역시 엄청나게 큰 죄이기 때문이다. 자기 철학이 없다는 것은 자기 궁리함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위기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철학이 없는 나라는 스스로의 결단과 궁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강대국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노예의 모습을 보일 뿐이다. 


외국 군대로 자신을 지키려는 어리석은 나라, 그것을 실리(實利)라고 이야기하는 이상한 나라, 자기 존재의 무게를 그저 남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나라, 왜 이런 이상한 일이 있을까? 바로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철학, 즉 자기 고민과 주체성 그리고 궁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철학이 없다는 것은 또 미래가 없단 말이기도 하다. 우리라는 하나의 정체성, 자기 존재의 확인 없이, 온전한 의미에서 하나의 우리로 존재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도 허사다. 우리를 위해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 온전한 궁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이야기하는 미래가 없는 이들에게 삶의 목적은 그저 풀칠이다. 큰 사업의 목적 역시 그저 당장 살아감이 전부다. 당장 ‘돈’이 된다면 미래를 보지 않고 강산을 파괴한다. 사대강의 비극을 보라. 돈이 된다면, 자라는 아이의 미래를 보지 않는다. 과연 우리에게 철학이 있는가! 비극적이지만, 자기 철학 없는 이들에게 미래를 향한 원대한 꿈은 불가능하다. 철학 없이 일군 꿈이란 것도 일시적이며 작고 초라하다. 구차하다. 이 모든 죄악과 고통이 바로 자신의 존재를 망각할 때, 일어난다. 우리의 철학, 즉 한국철학이 없을 때 등장하는 일이다. 함석헌의 충고가 아프게 다가온다. 


이 땅의 많은 철학자는 한국철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서구 철학의 소비자일 뿐이다. 이러한 소비는 우리에게 지식을 주었지만, 한국이란 현실을 살아가는 이의 현실적 삶을 위한 지혜를 주지 못했다. 철학은 ‘지식의 사랑’이 아닌 ‘지혜의 사랑’임에도 말이다. 즉 이런 소비는 한국철학이 되지 못했다. 한국철학을 만들지 못한 철학에 대하여 대중은 무관심으로 답했다. 철학과가 사라지고 있지만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고 있다. 이제 한국철학, 우리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며, 우리의 지금과 미래를 궁리하게 하는 철학, 우리의 아픔에 함께 울어주는 이 땅의 철학이 필요하다. 그런 한국철학이 등장하는 순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철학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필진정보]
유대칠 : 중세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는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중이다. 현재 대구에서 오캄연구소를 만들어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 중이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