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7일 토요일, 맑음

오월이 되자 휴천재 왼쪽으로 흐르는 솔숲에 “홀딱벗고 홀딱벗고” 우는 검은등뻐꾸기와 휴천강 건너에서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우는 소쩍새가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는 이들의 맘은 아랑곳 않고, 밤을 새우고도 모자라 동이 다 터오는 새벽까지 서름을 이어간다.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김소월)

어린이날인 5월 5일에 태어나셔서 95세가 되는 문동환 박사님의 생신잔치 사진을 딸 문영미씨가 페북에 올렸다. 지금도 아내가 시작했던 ‘두레방’에 관한 여성신학적 고찰이 담긴 책을 쓰고 계실 정도로 문박사님은 정신이 맑으시지만, 사모님은 한목사의 말처럼, ‘예쁜 치매’가 걸려 아무도 못 알아보신다. 생일 케이크를 받고 문박사님이 아내와 나눈 두 마디가 실려 있다.

아버지: “Do you know who l am?” (내가 누군지 알아요?)

어머니: “You are in love with me.” (나한테 사랑에 빠진 사람!)

그러고서 어머니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뽀뽀를 하신다.

그가 누구지? 이름이 뭐지? 모든 것이 망각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모든 것의 의미가 없어진다. 오직 사랑뿐. 어떤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자리에, 비온 후 작은 웅덩이에 고여 남아있던 한 줌 흙탕물처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끄집어낸다는 건, ‘사랑이 이뤄낸 기적’이다. 그 짧은 글에 마음이 뭉클하고 눈가가 축축해진다.

나도 보스코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이 치매가 걸려 모든 기억이 사라졌을 때 당신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의 조용한 대답: “나~니~” 총각시절 날 부르던 애칭은 절대 잊을 수 없다는 말인데, 설령 듣기 좋으라고 한말이라 하더라도 기분이 좋다.

밤새 비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잔 것 같은데, 커튼을 젖히니 먼 산은 황사에 어지럽지만 해가 활짝 웃어준다. 새벽에 비가 올 거라면서 밤늦도록 해바라기를 심고 올라온 아내의 정성이 아까웠던지 보스코가 조루를 들고 내려갔다. 나도 입구의 돌담위에 다시 심은 제비꽃과 서양 채송화에 물을 듬뿍 주었다. 

지나가던 제동댁이 내 귀에 살짝 하는 말이 “재미지겠수!” 전 같으면 “먹을것도 아닌데에 어째 아깝게 공을 드린담?” 하더니 이젠 저 아짐들도 우리 부부가 하는 소꿉장난 같은 짓을 구경하는 게 재밌는지 슬쩍 놀리고 지나간다.

요즘은 웃어도 힘이 없어 보이는 미루에게 오후 간식 시간에 김밥을 좀 챙겨서 찾아갔다. 창원의 모세 아우도 와서 일손을 돕고 있었다. 약초밭을 갈려고 했는데 자그마한 ‘관리기’로 갈다보니 성에 안 찼나 보다. 그래서 ‘트랙터’를 사기로 했단다. 기계를 갖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기계의 효용성을 알기 때문이다. 한번 올라간 문명의 맛은 다시 내려오기가 여간 힘들다..

8년전에 평양에 갔을 때 우리나라 남대문 같은 거대한 기와집을 수리하느라 기왓장을 올리는데, 우리 같으면 기계로 들어올려 작업을 할 텐데 갯바위에 따개비처럼 사람들이 잔뜩 올라가서 기와를 한 장씩 전달하는 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전체주의에 비효율성이 딱해 보인다니까, “그런대로 모두에게 일자리는 있지 않느냐?”라는 보스코의 해석이 나왔다.

모든 일이 기계화하면서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얼마나 많은 가장들이 실업자로 전락하는가! 기계의 손이 최고의 파워가 됐고, 기계 없이는 뭘 하려는 엄두마저 못내는 현대문명은 대한민국 최고의 국수와 장기로 이기는 로봇이 머지않아 대부분의 일자리를 차지하리라는 미래학자들의 경고를 바싹 당겨 실현하고 있다. 모심고 벼베는 논에서도, 양파 캐고 감자 캐는 밭에서도, 우리 집 올라오는 샛길의 콘크리트 포장에서도,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하이패스에서도 생생하게 실감하는 중이다.

기계 없는 손일은 혼자사는 아짐들에게만 남겨졌다

실제 집안일을 하다 보면 내 손으로 해 놓는 일이 어떤 기계의 어느 작업 보다 귀하게 여겨진다. 지난번 후배들의 휴천재 방문 마무리로 식탁보와 시트 등을 다리미질했다. 뜨거운 다리미 바닥이 스팀을 뿜으며 지나가는 자리마다 말끔한 길이 생긴다. 다리미질해 쌓인 옷가지를 보며 한 가지 일을 마감한 뿌듯함에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