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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 전순란
  • 등록 2016-05-13 11:23:28
  • 수정 2016-05-13 11: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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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2일 목요일, 맑음


아침을 먹고나면 “나 화장 끝낼게”라면서 보스코에게 설거지를 미룬다. 그러다 보니 되레 그의 입에서 “화장 끝내!”라는 말이 나오고 팔을 걷으며 싱크대로 간다. 다음 주 독서회 숙제를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터라 빨래 바구니를 들고 널러 올라오자 “내가 널어 줄 테니 책이나 읽어!”란다. 테라스에서 빨래를 털어 너는 노신사(해볕이 따가와 흰 중절모를 눌러 쓴)의 모습에 좀 미안해 책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더니만 할 일이 창밖에서 줄줄이 나를 부른다.


비가 왔다고 물을 안주었더니만 지붕밑 나무화분의 꽃들이 늘어져 있어 물을 듬뿍 주고, 마당에서는 요즘 비에 염치없이 자라 오른 잡초를 뽑았다. 시골에 살면서도 우리부부처럼 많이 나돌아다니는 사람은 집안팎에 자라는 모든 식물들에게 미안한 심경이다. 푸성귀와 화초에게는 잘 돌봐주지 못하는데도 혼자 피고자라 미안하고, 잡초는 그냥 자라게 버려두다 꽃을 피우고 씨를 맺을 즈음에야 인정 없이 뽑아버리니 약도 오르고 억울도 할 게다.



보스코가 운전을 하면서 강연을 다니고 외출을 할 수만 있다면 내 일도 절반으로 줄 텐데... 엊그제 봉화에서 만난 분들, 심지어 영부인마저 보스코 더러 왜 혼자냐고 묻고, 화순에서 만난 벗들도 어째서 그냥  왔느냐 의아해하더라니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난 늘 ‘배우자’(配偶者: ‘아내 配, 짝[인형] 偶, 사람 者)로 그의 곁에서 등장해야 하는 몸이다. 고맙게도...


엊그제 만난 화순의 벗들이 70, 80 노인들이면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면서 떠들어대는 모습을 지켜보니까 정상적인 사람은 모임을 주최한 집주인 스테파노 교장뿐이더란다. 보스코는 아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남편이고, 보니파치오는 치매에 든 아내를 위해 모든 가사와 식사를 도맡을 정도로 ‘유능해진’ 남편이고, 수복씨는 자정을 넘겨서도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는 ‘충직한’ 남편이고(광주 가까운 화순에서는 물론, 저녁 7시면 모든 차편이 끝나는 이곳 지리산 함양에 와서도, 심지어 부산이나 마산에서 모임을 가져도 자정 넘어 어떻게든 광주까지 밤새워 돌아간다!), 나이 86세의 ‘방지거씨’는 끼니마다 아들과 딸과 부인과 당신(전직 교장)이 따로따로 밥상을 차려 따로따로 먹는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독자적’ 남편이고...



“여보, 사람들이 나이 들면 다 비정상이 되는 거야?” 라고 물으니 “아마 당초부터 그런 끼가 있었는데 늙어가면서 심해졌을 거야”라는 답변. 어떻든 50년 우정이 그리워 해마다 한 번씩 만나는 그분들이 무척 부럽다. 


보스코의 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이 가는 길에 면사무소에 들렀다. 이번 길 공사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길을 포장하면서 집수구(集水溝)를 하나도 설치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였더니 적어도 우리 집 도랑에는 돈생기면 바로 해 주겠다는 담당계장의 호언. 그런데 그 돈이 언제 생기느냐니까 자기도 모른단다. 참, 책임감 있는 공무원이고 함양에서나 듣는 말씀이다.




장날이어서 모종 몇 개를 사고 돌아왔더니 보스코가 텃밭에서 예초기를 돌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두어 차례 풀을 베낸 터에 처음 돌리니 풀이 웃자라 자르는데 힘들어 한다. 그가 풀 벤 자리는 거의 추상미술의 경지여서, 영화 ‘라이안의 처녀’에서 마을사람들에게 머리 깎인 처녀의 듬성듬성한 머리칼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교수님 솜씨가 그 정도라도 아내로서는 만족할 수밖에....



플라비오가 청첩장을 보내왔다. 결혼장소가 시칠리아 카타니아고 피로연 장소는 그 일대에서 가장 호화로운 ‘오아시스’인데 거리도 여비도 과다하여 가기에는 좀 어렵다.


80년대 초 오스티아 항구도시에서 살 때 플라비오의 형 만리오와 우리 빵고를 유아원에 함께 등교시킬 적에 걔 엄마 세레나의 볼록한 뱃속에 들어있던 아기다. 초등학교 때에 엄마를 여의고 말수가 적어지고 외롭게 살아온 젊은이가 드디어 장가를 간다니 마음이 놓인다. 얼마간의 축의금만 신랑 아버지 마리오에게 부치고 이 젊은이의 외로운 마음을 신부가 충분히 다독여주기를 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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