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올해 3월부터 가톨릭프레스는 매월 특집 주제를 선정해 주제와 관련한 내용을 취재하고 분석하여 연재 보도 합니다. 특별히 연재 마지막 편에서는 [마무리와 제안]을 보도 합니다. 특별보도팀 ‘저스티스(Justice)’는 가톨릭프레스만의 살아있는 언어로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두 번째 특집 주제는 [사제 양성의 위기]입니다.
가톨릭대학의 모체로 볼 수 있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은 1855년 배론에서 시작해 지난해인 2015년 개교 160주년을 맞이했다. 가톨릭대학은 그간 한국교회를 이끌고 지탱했던 수많은 한국인 성직자들을 양성하며 150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왔고 또한 발전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역사의 위기 속에서도 전통을 이어왔으며, 국가의 존망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신학교육은 그 명맥을 이어왔다.
국가적·민족적 위기를 겪으며 버텨온 신학대학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 성소 지원자 감소 위기는 인구고령화와 저출산, 소비문화와 치열한 경쟁사회가 낳은 종교계 공통의 문제로 안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가톨릭대학이 마주한 성소자 양성의 위기는 이전의 그것과는 방향이 다르다. 외부로부터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속화되는 위기이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벗겨내니, 튀어나온 ‘최하위’ 결과물
앞서 기사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성소자 감소는 단순히 대학 신입생 감소에 국한되지 않았다. 입학 정원을 일정수준 유지하기 위해 일부 신학대학에서는 자체적인 입학기준 보다는 지원자들의 기준에 맞춰 신입생을 선발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聖召)를 학과 성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다. 따라서 각 신학대학에 학생선발 재량권이 주어졌고 그 결과 입학지원자들의 하향평준화는 교회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 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각 신학대학의 교과과정은 신학과 철학에만 편중된 양상을 보였다. 성소자는 사람과 소통하거나 세상과 교류하는 학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타 종교 신학대학은 인간발달이나 심리학, 상담, 아동·청소년·여성의 이해, 현대사회의 리더십, 미디어 활용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제공했지만, 가톨릭대학은 성소자들을 기숙사에 봉쇄시키고 제한된 학문으로 가르쳤다. 이렇듯 강좌개설의 한계는 변화하는 세계의 학문들과 교류하지 않는 집단적 폐쇄성에 기인한다. 곧 새로운 학문의 유입이 자칫 교회의 존재 위기로 이어질까 하는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전임교원이 교육과 생활지도, 영성지도까지 겸임해야 하는 가톨릭 신학대학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부산 신학대학은 1명의 전임교원이 30명의 성소자를 담당해야 했다. 봉쇄를 통한 신비주의의 껍질을 덮었지만, 양성자의 실질적인 교육여건은 일반대학에 적용하는 기본적인 기준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은 연구를 하지 않았다. 특히 광주 신학대학은 전임교원 확보율이 재학생 기준 267%로 가장 높았지만 1인당 연구논문 실적은 0.25를 기록해 28개 종교대학 중 꼴지를 기록했다. 또한 3년 동안 11편의 연구논문을 기록하면서 대전 신학대학과 함께 최하위를 기록했다. 가르치는 자가 스스로 깨우치고 공부하는 일을 포기한 것이다.
연구논문 실적은 7개 가톨릭 신학대학을 모두 합쳐도 상위 타 종교대학보다 적었다. 각 대학들은 국내논문을 넘어서 국제논문의 성과를 측정하고 있지만, 조사결과 가톨릭 신학대학은 국제논문은커녕 국내논문에서조차 최하위였다. 국제논문 게재는 서울 신학대학만 0.17을 기록하고 나머지 신학대학은 3년 동안 국제논문에 대한 추억이 없었다.
성소자들을 양성하는 신학대학 교수사제들은 자신이 가르쳐야 할 과목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종교 대학들이 연구 논문을 통해 정체된 흐름을 깨고 스스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과 달리, 가톨릭대학은 정부가 대학 평가를 위해 마련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기에도 버거웠다. 가톨릭 신학교육의 역동성이 어느 순간 멈추어 선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소통’과 ‘공감’능력을 키워주는 사제 양성 과정이라야...
현대사회에서 부각되는 ‘소통’과 ‘공감’능력은 이미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중요하게 연구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당신 아들인 예수를 인간의 손에 맡겼다. 가톨릭에서 예수의 존재는 신이 인간과 가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소통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제는 그러한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 발자취를 따르고자 한다.
그런데 신학대학의 사제 양성과정 중에 눈에 띄는 것은 특수한 교육과정이나 봉쇄 양성에 심취한 ‘소통의 부재’였다. 이는 교내생활 뿐 아니라 학문과 사회봉사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났다. 타 종교대학은 인문소양과 역사, 심리와 상담, 행정, 예술, 미디어 등 신학뿐 아니라 사목에 필요한 다양한 소통의 도구를 함께 배울 수 있지만 가톨릭 신학대학은 철학과 신학, 그리고 그것을 위한 일부 부수적인 교양과목이 전부였다.
본당 사제는 신자와 세상, 그리고 사회의 여러 사람들과 관계 맺고 소통하게 된다. 또한 사제는 어느 상담가 못지않게 신자들의 삶에 귀 기울기고, 공감할 것을 요구 받는다. 특히 신학대학 지원자가 감소하면서 사제성소와 관련한 본당 사제의 역할이 강조되는 만큼, 양성기관에서는 그에 대한 교육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
신학대학에서 기도생활과 묵상으로 길러진 영성이 사목전선에서 마주한 신자들의 상황에 맞게 녹아들 수 있어야 하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판단자’ 보다는 인내가 필요한 ‘위로자’와 ‘안내자’의 역할이 수행돼야 한다. 특히 개개인의 개별 체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이고 학업적인 수양과정을 통해 배움의 폭을 넓히고 그 가운데 개별 체험의 깊이를 심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절실하다.
노동 경험이 없는 사제가 노동자를 이해하고, 불합리한 알바 경험이 없는 사제가 청년들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기란 힘들다.
또한 그 실천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각 신학대학 설립이념에 있어서 봉사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각 대학들은 일회적이고 이벤트성이 짙은 모라토리움 봉사활동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모라토리움은 신학생에 대한 봉사활동 기관의 평가가 내재돼 있고, 그 평가는 성소자의 성소식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발적인 봉사역량을 강화하기 보다는 통과의례와 같은 성격이 짙다. 또한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간 규정된 통과의례적인 모라토리움을 마치면 이후부터 봉사활동에 대한 수련과정이 없다.
장애인과 노동자, 실직자, 질병으로 고통 받거나 가난한 사람 등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는 이웃의 아픔을 모든 신학생이 느끼고 체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러한 아픔에 사목적 의지를 가진 신학생이 있을 때, 보다 전문적이고 능동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그 선택의 품을 열어두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노동 경험이 없는 사제가 노동자를 이해하고, 불합리한 알바 경험이 없는 사제가 청년들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기란 힘들다. 간접체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단면을 체험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이해의 폭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벤트적인 모라토리움 이외에 사랑을 실천하는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봉사과정과 교육이 필요하다. 타 종교대학에서 성직자 양성과정에 포함된 봉사프로그램을 연구해, 신학생들이 양성기간 중 봉사의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적어도 일반 대학생들에게 대학의 사회봉사 역량을 떠넘기거나, 신학생에게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면제’를 혜택처럼 제공하거나 ‘각자 알아서’하도록 방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학문적인 소통도 절실했다. 타 종교대학은 성직자를 양성하는 과정에 다양한 인문적 과목 뿐 아니라, 생명과 관련한 생물학, 일반 과학 입문과정도 선택해 배울 수 있어, 양성과정 중 신앙과 이성이 적절히 조합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특히 사목에서 중요한 영역을 담당하는 건축과 재정도 선택해 배울 수 있었으며, 최신 미디어를 활용해 성경과 교리 내용을 전달하고 연구하는 것을 가르치는 과목도 있었다.
‘현대의 사제양성’에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과 생생한 의미의 관계를 원하는 인간의 보편적 경향을 다루면서도, 이를 반드시 종교의 이름으로 소화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이념을 현대 문화와 접목해 녹여내는 일은, 지금처럼 신학과 철학에 편중된 교육과정으로는 불가능하다. 신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신학대학이 통합적인 지성인을 키워낼 때, 교회는 보다 풍성하게 세상을 위로하고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
양성자 교육 없이, 훌륭한 양성 기대할 수 없다
신학대학 자체의 건강상태를 들여다본 결과 가톨릭대학교는 교육기관 자체로서의 정체성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가르치는 자가 연구를 하지 않고 그 결과는 종교학과 중에 최하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철학과 신학에만 교육과정의 열성을 쏟으면서도 신학과 철학 분야의 연구실적은 종교대학 종교학과 중 최하위였다. 초라한 성적표에 대한 이유는 신학생들의 생활과 영성을 전임교원이 겸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톨릭대학들은 신학생들의 통합적 양성과정을 시행하기 때문에 연구를 하지 않는 부실한 대학이 됐다는 말인 셈이다.
가톨릭대학이 오랜 역사와 그 특수성을 자랑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신학생의 통합 양성과정이 대학의 연구 활동을 방해한다면 이러한 양성과정을 수정하거나 통합 양성과정을 수해할 수 있는 전담 교수와 전문인력을 보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 통합 양성과정이 어렵다기 보다는 신학대학들이 양성과정의 특수성을 이유로 연구를 하지 않겠다는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논문과 저서가 없는 교수들이 태반인 신학대학교의 양성자들은 양성을 위한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는다. 곧 신학과 철학은 공부했지만 그들 스스로도 교육학이나 심리학 등 인간 발달과 양성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영성지도는 영성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영성가가, 생활지도는 세상에 모범이 되는 안내자가, 그리고 교육은 쇄신과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깨어있는 교육자가 할 수 있도록 교육체계를 재편하고 양성자 교육 방침을 마련하는 일 또한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고름’ 놔두고 ‘덩치’ 만 키우면 무슨 소용 있나, 교회개혁은 신학교 혁신에서 시작된다
일각에서는 성소지원자 감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산된 신학대학의 통합론을 주장하고 있다. 지방으로 분산된 신학교를 합쳐, 자체적으로 규모를 키우고 교육의 질을 올리는데 더욱 집중하자는 것이다. 신학교 통합의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훌륭한 교수진의 확보, 교구간의 교류 증진, 재정부담의 감소 등이 있고, 나아가 신학교를 더욱 개방하고 전문화하여 한국의 사제 양성만이 아니라 아시아 교회의 인재 양성을 위해 한국가톨릭 신학전문대학원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4.01호)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은 교과과정, 교원, 교육방식 개혁 등의 체계적인 계획 없이는 외부의 중소 대학을 흡수해 덩치를 키우거나, 교회 내 신학교 간의 통합을 통해 덩치를 키우자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렵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과 영성교육, 통합적인 지성교육, 다양한 분야에서의 사목교육, 생활·연구·강의 전담 교수의 분리와 보강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신학교간의 열린 토론, 현실적인 합의를 우선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백성 스스로 하느님을 찾고 전한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톨릭대학은 이러한 한국 천주교의 특수성을 보다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과 철저히 벽을 세우고 교육기관으로서 최하위의 성적표를 달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성소자가 많이 들어오고 훌륭하게 양성된 사제들이 배출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오만과 착각이다. 중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덩치’키우기 또는 ‘생명 유지’ 보다, 신학대학 스스로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하고 적극적으로 개선에 임하는 주체적인 모습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루카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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