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8일 수요일 맑음
자정이 넘어서도 잠 못 이루는 보스코가 몸을 뒤척였다. 5.18마다 다시 찾아오는 분노의 고통이 어제밤도 그를 괴롭힌다. 그가 사랑하는 고향 광주, 그곳 사람들의 애향심은 희로애락을 함께한 가족만이 공유할 수 있는 특이한 감정이다. 그런 그를 말없이 지켜보는데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한다, 못 한다로 아픈 상채기에 소금을 뿌려대는 사람들의 심보는 뭘까?
모든 언로가 막힌 상태에서 유일하게 서울교구 주보에 광주의 유혈사태를 실어 알리려고 동분서주하던 보스코, ‘합수’(윤한봉)를 숨겨주려 노심초사하던 그는 결국 보안사 손길이 다가오자 내 대모가 되신 김상옥 수녀님네 수녀원(오산)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 찬성이 서방님 가족까지 데리고 몸을 피해야만 했다. 무려 두어 달이나!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그의 입술에서는 이 겨레를 위한 Miserere(주여, 이 겨레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가 그치지 않고 있다.
(그해 '서울주보'와 '경항잡지'에 쓴 보스코의 글이다.
▶ 서울주보에 쓴 글 보기 / ▶ 경향잡지에 쓴 글 보기)
군사반란 집단의 정권을 결코 용납 못하던 그의 의분을 보다 못해 송신부님이 그에게 유학을 권유하고 주선하여 로마로 떠나게 하신 게 우리 유학생활의 시작이다. 35년이 세월이 지났어도 저 잔학한 보수세력의 득세로 5.18은 여전히 미완성의 민주화운동이다.
휴천재 지붕위엔 연기가 안 오르는 굴뚝이 하나 있다. 2층 마루에 벽난로를 놓았는데 연기가 마루로 나와 제대로 불을 지핀 기억이 없고, 굴뚝에만 입주자들이 봄가을로 바뀐다. 이번엔 검은 찌르레기가 며칠간 집을 둘러보더니 오늘은 어디서 새색시도 구해왔다. 휴천재 마당을 가로지르는 전화선이 보기 싫어 땅속으로 묻으려다 그만둔 건 그 전선 위에 앉는 산새들의 재롱을 보는 재미 때문이다.
이장님 논을 써레질하는지 시끄럽다. 밖으로 나가보니 지난번 우리 대문을 부순 그 영감님이 기계를 몰고 있다. 우리집만 아니라 가밀라 아줌마네 전화선도 끊어놓았고 도미니카 ‘소담정’의 처마와 홈통도 망가뜨렸다. 시골인심이라 고쳐달라 말도 못하고 끙끙거리다 각자 알아서 고친다. 그 사람 불러다 일을 시켰던 이장댁은 당당하게도 “실수로 그랬는데 우얄끼고!” 라고만 하는데 나도 담에 내가 실수할 때를 생각해서 그 한 마디를 맘에다 저축해 둔다.
그런데 이장님이 한 술 더 떠서 마당 입구에 세워놓은 차를 저쪽으로 빼달란다. “트랙터가 대문이나 집벽을 부수면 고치기 수월하지만 차 망가지면 우선 불편할 거 아니요?” 참 친절도 하셔라. 그 할배가 옆논을 다 갈고 동네를 빠져나갈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지켰다, 여차하여 이 몸 하나 던져 막겠다는 자세로. 그런데 오늘은 영감님 실수가 없어 내가 순절할 (하필 5.18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기회는 없었다.
독서회 모임이다. 읍내 나가는 길에 보스코를 데려가 침을 맞히고 군내 버스로 그를 집으로 보내고 나는 차를 끌고가서 고쳤다. 소나타(‘SONICA’라고 붙어 있다)가 십년이 넘자 이쪽저쪽이 쑤시고 아프다며 엄살이다.
오늘은 내가 독서회 당번이라 먼저 와서 문을 열고 아우들을 기다렸다. 이번에 읽은 책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날마다 일기를 써 올리는 내게는 매우 유익한 안내서다.
“생각과 느낌을 소리로 표현하면 말이고 문자로 표현하면 글이다. 말이 곧 글이다 그렇지만 근본은 생각이다. 글을 올바로 쓰고 싶다면 생각을 바르게, 정확하게 하라! 논리 글을 잘 쓰려면 논리적으로, 곧 앞뒤가 맞게 생각해야 한다....”
“논증의 아름다움을 구하려면 꼭 지켜야하는 세 가지 규칙. 첫째, 취향, 고백, 주장을 구별한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그 주제에 집중한다.”
못나게 쓴 글을 알아보도록 여러 예문의 ‘원문’과 ‘고친 글’을 비교해 보니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선명해진다. “많이 쓰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글쓰기엔 비법도 왕도도 지름길도 없다” “말로 읽어서 좋아야 잘 쓴 글이다” “글쓰기를 잘하려면 글에 맞게 살아라. 잘 살아야 잘 쓸 수 있다. 글은 온 몸으로 써야한다” 밑줄 그을 데가 한정 없다.
9시가 훨씬 넘어 집에 돌아오니 보스코는 아직도 조올조올 하면서 책상에 앉아 있다. 5.18보다 엄청나게 가슴을 앓은 지리산, 그 산도 마을도 깊이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