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8일 토요일, 맑음
아침부터 참외장수 트럭의 마이크 소리가 소란하다. “꿀, 꿀, 꿀참외요!” 하는 스피커 소리가 내 귀에는 “물, 물, 물참외요”라고 들린다. 이미 여름이어서 창문을 열고 집에 있으면 종일 울리는 스피커 소리에 짜증도 난다. 하지만 저 소린 (‘선전’도 아니고 ‘광고’도 아니고) 걸러서 듣자면 “참외 좀 사주시오! 이걸 팔아야 자식새끼들 하고 먹고 삽니다”하는 비명인데, 남의 간절함이 전달되지 못하여 귀는 쩔고 맘마저 돌덩어리로 굳어지는 듯하여 미안하기도 하다. ‘돌같은 심장’,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멸망을 예고하는 징조인데....
어제는 내가 마당에서 가지치기를 했는데 오늘은 비자나무와 주목 등을 보스코가 손질하고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어 내다보니 창고속의 모든 물건들을 꺼내서 장독대에 일렬로 늘어놓는다. 말하자면, 오래된 물건과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뭐 했느냐는 시위다. 어디서든 할 일은 태산 같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지금 저래 놓으면 어쩌라고?
더구나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대문 밖에도 나가 보라”는 말을 듣고 나가보니 뒤꼍의 모든 물건이 대문밖으로 쫓겨나와 쌓여 있다! “이걸 어쩌라고?” “당신은 5분이면 다 해결할 꺼야!” 하는 수 없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 스티로폼, 비닐, 병, 캔, 전깃줄 등, 그간 엽이가 집 뒤에 쌓아 놓은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면서 한 시간 넘겨 치웠다.
“이러다 보스코가 냉장고 물건을 몽땅 꺼내놓고 치우라면 어쩌지?” 친구가 여성 호르몬 보충을 위해 칡즙을 주문해 먹었더니 숙취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서 남편이 아내보다 더 열심히 챙겨먹더란다. 그 뒤 여성 호르몬이 과다분비됐던지 그 남자, 걸핏하면 냉장고 문짝을 열고 마누라에게 잔소리를 하더라나! (보스코도 나모르게 칡즙을 먹었나? 잘 감춰놓고 나만 먹어야겠다)
조카 미선이가 내 일기를 읽고 댓글을 달아 “못난 아들은 내 남자, 잘난 아들은 며느리 남자!”라고 고쳐주면서 빵기 오빠는 ‘며느리 남자’가 맞단다. “못난 소나무가 고향 언덕 지킨다”는 속담이 있다지만, 3포족, N포족으로 컹거루처럼 매달려사는 아들보다는 ‘며느리 남자’로 살고 있는 아들이 훨~ 낫다는 말일까?
고부간의 갈등을 하소연하는(=시어머니 흉보는) 자리에서 내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면 아낙들이 늘 내게 눈총을 보낸다. “우리 시어머닌 한 마디도 없으셔”라면 “좋겠수!”라는 시샘. 한 술 더 떠 “당신 계신 데서 절대 안 나오시거든”하면 “건넌방에 꼼짝 않고 들어앉아계신단 말야?”란다. “우리 시어머닌 사진틀 속에만 계셔서 절대 말이 없으시다”는 말까진 차마 않는다. 아낙들의 염장을 질러 “난 시집살이 안해 본 여자랑 말도 섞기 싫어!”라는 핀잔을 들을까봐.
4.19 탑 건너편 중국집 ‘황성’에서 문섐 가족을 만나 저녁을 대접받았다. 우리 빵기도 일을 빨리 끝내고 달려와 합석했다. 김원장님과 문섐의 딸, 아들(둘 다 엄마를 닮았다)네 식구가 왔다. 밝고 다정다감한 점은 엄마와 같고, 아빠한테서는 균형 있는 판단력을 물려받아 반듯하게 컸다. 이렇게 훌륭한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다.
‘2차’는 20여분 걸어와 우리 집에서 했다. 그야말로 차와 과일을 함께 하며 환담을 나눴다. 두 가족이 정치관, 사회관, 인생을 바라보는 방향과 방법이 같아 마음이 통하니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9시가 되어 문섐 가족은 빵기가 지하철까지 모셔다 드리고, 보스코는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나는 일주일에 딱 한번 하는 TV 시청, 주말연속극을 보았다.
밤10시에는 테니스장에서 막 돌아온(현지시간 오후 2시) 시아와 시우랑 스카이프 통화를 했다. 시우더러 테니스를 어떻게 치느냐고 물으니 손으로 친단다! (“요~녀석!”) 시아는 안 그랬는데 시우는 가끔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쓴다면서 며느리가 걱정하더라는 사부인 얘기. 엄마인 자기도 ‘범생’이고 시아도 착실한데 시우가 저러니 난감하다는 딸의 호소에 “워낙 머리가 좋은 애들은 일탈을 꿈꾼단다. 그런 애가 크면 더 잘된단다”라며 달래주셨단다.
영화 <동주>에서 숙제도 안 하고 빤질거리는 동생과 형 사이에 “넌 담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사람이 되려구요”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우리 작은손주도 사람이 되려고 저럴 거다. “사람은 찾는 한 헤매는 법이다” (괴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