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일 수요일, 맑음
아버님 기일이다. 20년이 되어간다. 양신부님께 연미사도 부탁드렸고 손주인 빵고 신부도 할아버지를 위하여 미사를 올렸다고 연락이 왔는데 마음은 뭔가 미진하다. 집안 사정으로 여직도 덜 풀린 앙금에 보스코도 속이 편치 않을 꺼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동안 받았던 상처는 용서해드렸겠지만 상처의 자국은 그가 죽은 뒤에나 내려놓을까?
큰아들 혼자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눈을 감으시던 어머님의 마지막 말씀이 “다 내려놓습니다”였다니! 남편에 대한 원망, 시앗에 대한 미움, 졸망졸망 가여운 다섯 아이를 놓고 눈을 감아야 했던 한 여인의 마지막 말로 ‘용서’가 담긴 낱말이 나왔다는 것은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었다. 60년전 일이다.
영양실조와 홧병이 의사의 사망진단으로 나왔다는데, 그 당시 부도덕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죽어가던 여인들의 병명이었을까! 내가 어리던 60년대까지도 시골에서는 작은댁 한 둘 두는 게 부와 능력의 상징이었다.
지금 이웃에 사는 친구는 국민학교 시절 아버지가 어디서 첩질을 한다는 소문이 나면 엄마가 꼭 자기를 앞세우고 찾아가서 ‘그여자네 집’을 둘러보고 새로 산 이불 요와 살림살이를 들여 놓아 다 챙겨 주고서 무표정한 모습으로 말없이 돌아오시더란다. 심지어 어린 자기를 시켜 고추장 된장 항아리까지 들려보내시는데 그 집에 가는 일이 죽도록 싫었단다.
그렇게 몇 달을 살고는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몇 번이고 그런 파렴치가 되풀이되고 그때마다 엄마의 ‘시앗집 돌보미’는 반복되더란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지금 생각하면 시앗집을 돌보던 엄마의 심경이 어땠을까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단다.
그렇게 효성 차원에서 오늘 10시 평일 미사에 갔다. 우리 성당은 이 지역 특성상 교우가 대부분 노인들이다. 신부님도 강론시간엔 오늘 기념을 맞은 유스티노 성인 이야기가 전부였고 바닷 속처럼 고요한 미사시간엔 주일 어린이 미사 같은 생동감이 없다. 그래도 저 많은 분들이 하루의 중심을 주님께 두는 일은 대단하다. 가톨릭신문을 읽거나 평화방송을 들은 교우들에게서는 보스코의 「고백록」 간행을 두고 인사를 많이 받았다.
점심에 블란디나를 초대해서 함께 크림파스타를 만들었다. 그집 아들 천주가 좋아할 꺼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크림 스파게티 레시피:
[재료] 새우, 브로콜리, 양송이, 크림파스타(양파, 생크림, 우유, 우리밀 가루).
[분량] 새우 200g/ 브로콜리 1개/ 양송이 300g/ 파스타(뻰네) 500g
양파 1개/ 생크림 250g/ 우유 150g/ 우리밀가루 2T(테이블스푼)
① 브로콜리는 따서 데쳐놓는다
② 양송이는 손질하여 씻어 반으로 가른다
③ 양파는 다져놓는다
④ 다진 양파와 손질한 새우를 올리브유에 볶다 브로콜리와 양송이를 마저 넣고 볶는다
⑤ 우유와 생크림에 우리밀 가루를 잘 풀어 ④에 넣어 끓인다
⑥ 손질하고 남은 새우껍질에 물을 조금만 넣고 끓여 그 물로 소스의 농도를 맞추고
불끄기 전 다진 파슬리와 후추를 넣는다
⑦ 파스타로는 뺀네(penne)를 10여분 삶아 건져내어 소스와 버무린다
점심 후에는 블란디나를 바향할 겸 그니와 뒷산을 넘어 쌍문근린공원을 걸었다. 이른 오후여서 휴일을 즐기는 어르신들이 한가하게 쉬고 있어 요즘 등산로에 출몰한다는 악당은 나타나지 않았다. 언덕의 갈나무가 많이 컸고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그 길을 보여줄 겸 저녁식사 후에는 보스코와 다시 한 번 더 걸었다.
등산로에서 이웃에 살던 ‘삼성아저씨’도 만났다. 분당으로, 양주로 이사갔다 산이 좋고 이웃 교우들이 좋아 다시 이 골짜기 ‘우이그린빌라’로 이사오셨단다. 40년 동안 우리 아이들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갈나무들 사이사이로 건너다 보이는 다저녁 해거름의 삼각산도 그윽하게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