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원 30일 수요일, 소나기 오고 흐리다
주인 없이 남겨진 집은 나름대로 혼자서 추스른다. 꽃들을 보살피고 먹이를 찾아 가끔 날아오는 참새와 비둘기들에게는 주인이 오면 다시 오라 이르고 바람과 햇볕도 잠시 쉬어가도록 자리를 내준다. 우리가 없어도 창밖의 백합은 하얀 향기를 뿜고 루드베키아는 빛나는 노랑으로 길가를 지킨다.
그런데 왜 어린 꽃송이를 몽땅 떨군 능소화의 초라한 모습만 눈에 들어올까? 서울에 오면 담 장 안팎으로 찬란한 나팔들의 소리 없는 합창을 기대했고, 성모님 앞에서 화사한 재롱을 보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을까? 도대체 범인이 누굴까 찾아 나섰다. 한참 때는 더 많았을 점령군이 퇴각하고 무지렁이라 아직도 잔류하고 있는 범인을 생포했다. 심한 냄새를 풍기는 노린재다. 막 꽃송이의 목을 자르려는 현행범을 체포해서 모든 노린재를 대표해서 즉결심판에 넘겨 즉결처분하였다! 이 노린재는 자신이 당한 사법정의를 수긍했을까? 하느님이 꽃송이 자루에서 진액을 빨아먹는 식습관 하나만 주신 본능으로 억울하기만 했을까?
비도 오고 선선하여 책 보기에 딱 좋은 날. 표창원의 「정의의 적들」을 읽었다. 그 책 첫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연방 정부 법무부 청사 입구엔 ‘오직 정의만이 사회를 지탱한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정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어떤 위기와 위험이 발생해도 사회는 지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 안에 자본주의의 기반과 민주 사회의 원칙과 철학이 담겨 있고 이 간단하고 명확한 정의만 지켜진다면 사회는 안전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정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파괴된 지금 한국사회를 보면서 나만 이렇게 암담할까? 오늘로 문닫는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는? 우리 국민의 73.8퍼센트가 한국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했고 고교생 47퍼센트가 10억원이 생긴다면 감옥에 갈 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했다니....”
꽃송이가 모조리 잘려나간 우리 집 능소화처럼 절망적인 사회가 현재의 남한 사회다. 그래도 이런 사회에 희망의 씨앗을 심고 부패한 곳을 도려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라가 아직 망하지는 않고 있다고 내 마음을 추스른다. 오늘 ‘여인터(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행사에 서울까지 올라온 이유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보스코가 어제 뭘 먹었는지 속이 안 좋다며 화장실을 드나든다. 그에게 숯환을 챙겨주었다. 그는 배탈이 날 때마다 예전에 청소년들을 데리고 캠프를 갔을 적을 떠올리며 숯가루를 찾는다. 바닷가 캠핑촌에서 갑자기 배탈 난 아이들에게 약도 없고 병원은 멀어 난감했을 때 박병달 신부님이 시골집 가마솥 밑에 검댕을 긁어내 밥알과 으깨 환을 만들어 주시더란다. 그걸 먹였더니 애들 배탈과 설사가 감쪽같이 멈추더란다. 숯환을 먹은 그는 큰병이라도 난 듯, 세상이 끝난 듯 불쌍한 표정을 짓는데 나는 속으로 “살도 빠지고 보기도 좋구먼”이라면서도 “아이고, 당신 너무 힘들겠다. 너무 불쌍하다”는 립서비스로 위로 한다. [약처] + [악처] = ???
이화여대 ‘이삼봉홀’에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후원행사 “낯섦과 끌림 그리고 어울림”에 참석하러 배앓이 보스코에게 정장을 시켜 함께 갔다. 문정주섐과 김경일원장님 부부, 이순애씨와 그니의 친구, 엄경희씨와 그니의 친구가 우리 테이블에 함께했다. 이번 모금에 선뜻후원을 베푼 관대한 분들이다. 행사 사회는 센터에서 일하는 베트남 여인 ‘투’, 그리고 상담소 강소장이 맡았다. 공동대표들의 인사, 그리고 각 테이블의 인사 소개가 있었다.
한국염 대표는 가을에 열리던 후원행사를, 자금이 떨어져 하는 수 없이 6월로 앞당겼노라고 호소했는데 식사 후 공연도 센타 사람들이, 심지어 안무와 백댄스까지도 공동대표와 손님과 아이들이 도맡아 춤도 노래도 이주민 여자들이 해내는 원톱시스템!
억울한 베트남 여인의 사건을 변론해준 변호사단을 대표하는 두 변호사
전주 쉼터는 시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베트남 여인의 재판을 지원해서 4년을 끌고서야 대법원 파기환송을 얻어냈고, 변호인단이 이길 때까지 지원해온 고생이 소개되었다. 이 땅에 가난한 민중 중에 가장 가난한 이주여성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내 친구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좀 싱거운 공연이었지만 그 속에 깊은 의미를 찾아 읽는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슴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