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서나눔-김혜경] 딥러닝보다 더 ‘딥’할 수 있을까?
  • 김혜경
  • 등록 2016-08-08 12:54:38
  • 수정 2016-08-08 12:55:02

기사수정


지난 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바둑의 ㅂ자도 모르지만 인간과 컴퓨터 프로그램이 바둑을 둔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면서 기계를 상대로 뭐 꼭 그런 거까지 해야 하는가 생각했고. 이런저런 세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이세돌이 이길 거라 여겼다. 아무렴 기계보다 못하겠어, 이세돌인데…싶었다. 


그런데, 결과는 알다시피 사뭇 달랐다. 다섯 번 대국 중에 딱 한차례만 이세돌이 이긴 거다. 예상 밖의 결과에 깜짝 놀랐다. 도대체 컴퓨터가 얼마나 똑똑해졌길래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러면서 딥러닝이나 인공지능 같은 말들이 눈과 귀에 들어왔다.


▲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사진출처=SBS 뉴스)


뇌과학을 공부하고 카이스트에 있는 김대식 교수에 의하면, 알파고가 바둑을 학습한 방법은 실로 놀라웠다. 우선, 구글에서 알파고에게 16만 판의 바둑기보를 입력하고 이 데이터들을 모두 학습시킨다. 그 다음 알파고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 서로 대결하게 한다. 거기서 나온 수천수만 개의 데이터로 알파고를 다시 학습시킨다. 이걸 거듭하고 거듭하면 무한개의 기보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알파고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바둑을 배우는 거다. 그럼 이렇게 해서 터득한 바둑의 비법은 어디에 들어 있을까? 48층의 아주 깊은 신경회로망 안에 들어 있단다(p.215). 


여기서 잠깐, 48층? 신경회로망? 이건 또 뭐라지? 이걸 알려면 사람의 뇌 속을 좀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 뇌에는 10¹¹개나 되는 신경세포들이 10¹⁵개라는 엄청나게 많은 시냅스라는 연결선으로 이어져 있고, 그 신경세포들은 수천 또는 수만 개의 다른 세포들과 연결되어있다고 한다. 사진처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나 냄새 같은 건 뇌 속에 없단다. 뇌를 아무리 해부하고 해부 해봐도 무슨 영상이나 기억 같은 건 없다는 거다. 물론 자아도, 감성도 아무것도 없고 그저 끝도 없이 이어져있는 수많은 시냅스들만 존재한단다. 이 시냅스들 중 3분의 1정도는 유전, 3분의 1은 환경을 통해서, 나머지 3분의 1은 그냥 랜덤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일란성 쌍둥이도 백퍼센트 동일한 뇌를 가질 수는 없다고 한다(p.100).


그런데, 뇌가 받아들인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신경회로망(신경세포들이 결합해 형성된 망)들을 이론적으로 나누다 보니, 계층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서 이 망들이 10층에서 15층 정도 되는 빌딩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더란다. 우리의 뇌는 10층에서 15층 정도의 신경회로망을 갖고 일을 처리한다는 거다. 그런데 알파고는 48층이나 되는 신경회로망을 움직여 바둑을 두었으니 이세돌이 이길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였겠다. 


여기에다 알파고는 대국에서 이세돌보다 조금 더 우세하게 이겼을 뿐이어서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개발자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예컨대, 우사인 볼트가 초등학생과 달린다면 초등생보다 조금 더 빠르게, 고등학생과 달린다면 그보다 조금만 더 빨리 달리면 이길 수 있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서 달릴 필요가 없는 거다. 알파고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쯤 되고 보니 알파고가 좀 두려워진다. 


알파고가 학습한 방법인 ‘딥러닝’은 사람이 기계에게 일일이 세상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관한 많은 양의 데이터들을 그냥 집어넣어준다. 강아지를 알게 하려면 수천만 장의 강아지사진을 집어넣는 거다. 그러면 기계는 이 빅데이터들을 자체적인 인공신경망 구조를 통해 스스로 학습하고는 어떤 종류의 강아지든지 강아지로 알아보게 된다. 사실, 강아지가 뭔지 말로 해보라면, 몇 마디로 나타내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어쩐지 애매한 느낌도 든다. 그건 우리가 아주 잘 아는 강아지라도 그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건 전체의 10퍼센트에 불과하기 때문이란다. 나머지 90퍼센트는 말이나 기호로 나타낼 수 없다는 거다. 


게다가 뇌는 직접 세상을 보는 게 아니다. 전혀 완벽하지 않은 눈과 코, 귀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한다. 특히 눈은 문제가 많단다. 우리 눈의 망막은 뒤집어진 상태로 발전한 탓에 맹점도 있고, 망막 안에는 세포와 혈관들이 많아서 빛이 들어오면 그림자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뇌에서는 맹점도 그림자도 다 없애고 깨끗한 듯 보여준다. 또 망막을 측정해보면 대부분 빛알갱이들이 퍼져있는 확률분포밖에 없다. 우리가 느끼는 색깔이나 형태, 입체감은 뇌가 만들어낸 착시현상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명석한 두뇌는 오감이 주는 불완전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는 거다. 그런데, 해석을 한다는 건 간혹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객관적이지 않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뇌는 끊임없이 발달한다.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지만 ‘현실’이라고 하는 우주에서 가장 큰 빅데이터를 통해서 경험하고 학습하면서 지능을 더해간다. 이렇게 사람의 뇌가 세상을 읽는 방법으로 기계를 학습시키는 게 딥러닝이다. 이건 과거의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방식과는 다른 아주 새로운 패러다임이다(p.125). 


그런데 언어나 기호로 나타낼 수없는 90퍼센트나 되는 엄청난 양의 자료와 정보들은 어디서 구한다지? 우리가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많은 사진들, 소소한 이야기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딥러닝 기계를 학습시키는 빅데이터로 이용되고 있단다. 한 사람이 천만 개의 자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만, 천만 명이 하나씩 올린 자료를 사용한다면 그건 아주 쉬운 일이 니까(p.150). 구글도 페이스북도 마치 편리하고 훌륭한 서비스를 우리에게 무료로 제공해 주는 척 하지만 세상에나, 공짜는 없는 거였다. 


이런 식으로 발전한 2015년의 딥러닝은 층수가 152층이나 된단다. 천여 가지 물체를 단번에 알아볼 뿐 아니라, 농구를 하고 있는지 배구를 하고 있는지도 척척 알아보고는 자료를 찾고 관련된 글을 쓰기도 한단다. 이렇게 딥러닝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을 만들고 보니, 육체노동이 기계에게 넘어간 것처럼 상당히 많은 지적노동도 기계로 대체될 수 있을 거란다. 


그렇다면, 직업의 47퍼센트 정도가 사라질 거라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약한 인공지능’은 딥러닝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딥러닝의 기반은 데이터다.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데이터가 없는, 지금까지는 세상에 존재 한 적 없는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내야 한단다. 창의적인 콘텐츠를 가진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 이런 상황이 된다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약한 인공지능’은 사람과 비슷하게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읽고 쓰고, 정보를 조합하거나 이해하는 인공지능이다. 아마도 사람을 돕는 수준일 게다. 그런데 여기에 터미네이터처럼 독립성과 자아를 갖고 정신과 자유의지까지 갖게 된다면, ‘강한 인공지능’이 된다. 그럼 사람보다 지능도 앞서지 힘도 세지 일처리도 굉장히 빠르지. 아마 사람보다 훨씬 나은 존재일 게 틀림없다. 알파고를 보고나니 머지않아 이런 강한 인공지능 기계가 SF영화에서 현실로 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  


▲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 중


만일, 약한 인공지능이 진화해서 강한 인공지능이 되거나, 누군가가 강한 인공지능을 만들어낸다면? 여러 곳에서 시뮬레이션해보니 결론은 하나, 안타깝게도 인류멸망이란다. 지구를 차지한 강한 인공지능 입장에서는, ‘지구+인류’보다는 ‘지구-인류’가 더 좋다는 결론을 충분히 내릴 수 있을 거란다(P.322). 왜일까? 인류는 지구에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는 수많은 에너지와 동식물을 함부로 다뤄 왔다. 인류가 살아온 역사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깊이 있는 종교와 철학을 얘기하면서도 허구한 날 싸움질에 전쟁, 그러면서도 종교니 철학이니 하는 책은 또 그럴듯하게 쓴다. 기계에는 이런 데이터들이 이미 입력되어 있을 테고, 그걸 기준삼아 볼 때, 인류는 자신이 만든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종이라고 판단할 게다. 


어쩌면 좋을까? 혹시 우리가 도덕적으로 성숙한다면 기계가 좀 봐주려는가? 종교나 철학의 가르침들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노력한다면, 강한 인공지능이 ‘지구+인류’가 더 좋다고 해주려는가? 절대 바라지 않지만, ‘강한 인공지능’이 인류의 존폐를 손아귀에 거머쥐게 된다면, 미래에는 그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건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기계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며 ‘편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수동적이고 무능력한 삶을 계속 선택한다면, 결국에는 ‘강한 인공지능’의 처분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될 게다. 그래서 그에게 희망을 걸고 구원을 바라면서, 그에게 기도하게 되려나? 생각만으로도 우울하다.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