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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외려 그 뜨거움이 그리울 지경”
  • 전순란
  • 등록 2016-08-31 10:10:12
  • 수정 2016-09-02 09: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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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0일 화요일. 험악하게 흐리다 간간이 잔비


올 여름 쿨하네.

끈적끈적 들러붙지 않고

단 하루 고이 비 내리던 그 밤을 고비로

뒤도 안 돌아보고 쌩~ 하니 가버렸다.

외려 그 뜨거움이 그리울 지경

참~ 닮고 싶은 계절이다. (박맹순)


맹순씨는 등단 시인은 아니지만 타고난 시인이다. 요즘 날씨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여자들이 애기 낳을 때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던 그 기억을 자기가 낳은 아기를 안겨주는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듯, 우리도 그 지긋지긋한 더위를 벌써 잊고 실내온도 23도에 덧옷을 찾아 입으며 올해보다 더 더우리라는 내년 폭서를 견딜 힘을 키운다. 지옥 불 같아도 진짜 지옥은 아니라는 것, 견디다 보면 어느 날인가 지나간다는 믿음, 긴 장마 후에도 무지개를 약속받은 때문이다.



잔디밭에 풀을 뽑는 일은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다. 이런 사단이 나니까 잡초가 씨를 맺어 떨구기 전에 뽑아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는데도 예초기를 돌리는 사람은 풀 뽑는 사람과 동일인이 아니어서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다.


누구는 7만원에 약을 사서 ‘잡초를 잡으라’고 하지만 어느 해 우리가 로마에 간 틈에 그 약을 쳐서 잔디밭 잡초도 죽었지만 마당 끝 화단의 꽃들도 모조리 죽어버렸다. 남의 얘기는 원래 쉽고, 꽃 한 포기라도 애정을 갖고 돌보는 당사자가 아니면 암말도 말아야 한다.


오늘도 보스코와 두 시간 넘게 풀을 뽑았다. 호미질을 하다 내 호미로 내 손을 찍어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나도, 내가 일어나면 보스코도 따라 일어서버려 더는 안 할 것 같아 꾹 참고 했다. 앞으로도 한 열흘은 더 해야 마당의 잡초가 퇴치될 게다.



휴천재에 놀러 온 미루가 한심했던지, 자긴 단독주택 체질이 아니라면서 자긴 아파트에 살지 절대 단독은 안 산다나. 나는 힘들어도 단독이 좋다. 우이동 골짜기에서 40년을 살면서 연립들 새에 포옥 묻혀버린 채 아직도 단독을 고수하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


오후 3시쯤 ‘귀요미’와 이사야가 자기네가 키운 고추를 한 바구니 따들고 찾아왔다. 일하느라 고생하면서도 심은 게 신통하게 혼자서 잘 컸다고, 아니 하느님이 키우셨다고 자랑이다. 붉고 튼실한 고추를 받아 고맙긴 한데 토요일, 일요일에 계속 비가 온다니 말릴 일이 걱정이다. 


이럴 땐 맘씨 좋은 인규씨밖에 없다. 전화를 하니 자기네 것 끝물을 말리는 중인데 지금이라도 건조기에 넣어 그거 끝날 때까지 말려줄 테니 그 뒤는 나더러 알아서 하란다. 그래도 비가 오면 아마도 끌까지 말려주지 않고 못 배길 게다. 남정들의 선심을 끝까지 선용(?)하는 재주를 우리 여자들에게 주신 분은 찬미받으소서.


애플파이를 구워 주니 맛나게 저녁삼아 먹은 보스코에게 “저녁 잘 먹었으니 동네 한 바퀴 돌자” 하니,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긴 에사우 얼굴을 하고서 마지못해 따라 나선다. 종일 하늘은 험악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무시무시한 돌풍을 불어대면서 간간이 빗방울을 쏟는, 을씨년스러운 하루였다.



동네엔 텃밭마다 아짐들이 배추모를 심었거나 그 어둑한 시간에도 심고 있었다. 날이 가물어 그렇게나 애를 태우다 때맞춰 비를 내려 주셔서 동네 아짐들 얼굴이 환해지니 오늘 그 어두운 날씨에도 온 마을이 덩달아 밝아진 듯하다.


빵기가 지인의 결혼식에 갔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탈리아의 유명한 축구심판(삐에르루이지 꼴리나)를 만나 우리 두 손주가 뿌듯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이 나를 웃긴다. 빵기와 빵고가 어렸을 적에 짓던 표정 그대로다. 완전 대머리에다 부리부리한 눈총으로 선수들의 항의를 지레 묵살하는 명심판이다. 마리오도 산마르티노 동네의 축제 장면을 몇 커트 보내왔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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