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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두 분이 인생을 정성스럽게 사시네요”
  • 전순란
  • 등록 2016-09-07 1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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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5일 월요일, 소나기 온 후 흐림


평화로운 아침이다. 빗방울이 후드득 나뭇잎에 매달리고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대추나무 가지에 맺힌 은방울을 떨군다. 한가위가 열흘 남아 가지마다 대추들이 붉게 익어간다. 빗소리에 테라스로 나가 딸기그릇을 야외용 식탁 위에 놓는다. ‘휴천재 측우기(測雨器)’다. 측우기에 물을 채우겠다는 듯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스콜 수준이다.


엊그제 다녀간 ‘천정연’ 김재성 선생이 전화를 했다. 내가 집에 없던 지난 토요일 다른 손님들이랑 휴천재를 찾아왔다 내가 마련해놓고 간 쿠키랑 애플파이 잘 먹었다며 “두 분이 인생을 정성스럽게 사시네요”라는 생소한 덕담을 들려준다. ‘인생을 정성스럽게 산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하, 인생을 되는대로 사는 게 아니구나! 밥 한 공기, 물 한 그릇도 두 손으로 정성스레 받아먹어야 하듯, 삶도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받아 살아야겠구나!” 하는 심오한 이치를 건네받았다. 140억광년의 우주 역사에서 7, 80년은 별똥별 하나보다 짧은 순간이니 정말 정성을 들일 만하다. 



지난 목요일(31일)부터 MBC가 서울 상암동에 ‘내 고향 장터’라면서 지방 상인들을 모아서 장터를 열어준 행사를 마치고 진이네가 돌아왔다. 여러 지방에서들 왔는데 ‘지라산권 5개 시군대표’로 뽑혀 블루베리 가공품을 팔러 간 길이다. “재미 봤냐?”니까 사람들이 싼 것만 찾고 지갑을 열지 않아 고생만 하고 돌아왔단다. 지난번 ‘함양 산삼 축제’도 무더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들어간 경비나 당사자 수고에 비해 고객도 없고 재미도 못 봤다며 다음엔 참가 않겠다는 말들이 나왔다. 지자체들도 전시 행정 아닌, 축제다운 축제를 열려면 보다 많이 고민해야겠다.


서울 다녀온 진이엄마가 너무 지쳐 보여 방울토마토와 마늘과 올리브 오일로 스파게티를 하고 빵에 가지와 치즈를 올려 구운 요리를 해서 ‘개미부부’의 무탈한 귀향을 축하해 주었다. 정말 저 부부는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한다. 창밖엔 장대비가 내리면서 목조건물 아스팔트싱글 지붕 위에서 드럼 소리 곁들여 큰북까지 친다. 저 북소리 땜에도 인생은 나름대로 아름답다.


빵기가 유고슬라비아에 친구 결혼식에 데리고 다녀온 두 아이 사진에서 새로 산 모자를 눌러쓰고 여행 가방을 끌고 가는 시우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세 살 적(2012)에 고무젖꼭지를 문 채로 배낭을 메고 제 가방을 끌던 모습이 생각나서다. 아기들 키가 자라고 가방이 커지는 사이에 세월은 빨리도 흐른다. 


지난주에 뿌린 무가 새싹을 가득 올리고 쪽파도 실하게 올라온다. 멀칭하고 심은 배추도 며칠간의 비에 건강하게 뿌리를 내렸다. 포트에 싹을 틔워 밭에 옮겨 심은 줄기에서 작고 귀여운 오이들이 조랑조랑 열리고 며칠 안 본 새 화단 꽃들도 만발했다.




유노인이 논물을 보러 오셨기에 초봄에 얻어먹었던 오이 갚는다며 하나 따 드리니 “고추장에 오이 찍어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기라” 하시며 달랑 들고 내려가신다. 끼니마다 반찬 해주는 사람 없어 혼자서 차려 먹고 혼자서 잠드는 홀아비 처지다. 나 없는 사나흘을 생각해서 갖가지 반찬을 글라스록에 담아 일일이 이름까지 써 붙이고 갔건만 밥은 딱 한 끼 해 먹고 만 보스코는 유노인에 비하면 호사스런 배짱 아닐까?



오늘도 꼼짝 않고 책상에 앉아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씨름하는 그를 지켜보노라면 얼마 전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교장신부님이 옛날 앨범에서 보스코의 고딩 사진을 발견하고 카톡에 찍어 보내왔는데 “공부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마냥 행복했다”던 본인 말이 생각난다. 그래서 60년 지나고서도 저리 책상에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할까? 그를 조금이라도 걸릴 생각에 저녁식사 후에 산보를 나갔다가 다리께에서 ‘대충씨’네 막내딸 지나를 만났다.


군내버스에서 내려 땀을 뻘뻘 흘리고 걸어오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가을 교복’에 조끼에 가디건까지 입혔다! 11월 차림. 더운데 옷 좀 벗으라니까 귀찮단다. 이번에 엄마 따라 이름을 바꿨다는 소문을 들었다니까 ‘신이섬’이라며 그 이름도 귀찮단다. 북한이 '대한민국 중딩 2’가 무서워서 남침을 못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매사에 ‘귀차니즘’의 세대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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