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2일 월요일, 흐림
새벽에 유리창에 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김병주 교수님이 아침식사 전에 부디 의암호 주변을 거닐어 보시라고, 공기는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 그냥 가시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일러주신 말씀대로, 맘먹고 새벽잠을 깬 터인데 어쩐담? 하지만 7시쯤 되니 비가 멈춰 물안개가 멀리 피어오르고 있다. 어젯밤에는 물가로 설치한 네온사인이 눈을 어지럽혔는데 새벽빛에 호수와 산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길손을 맞는다.
아침식사를 함께하기로 한 김택신 신부님이 일찍 ‘상상호텔’로 오셨다. 농사꾼이 다 되어 손가락이며 손톱이 굵을 대로 굵어진 삽 같은 손을 흔들며 산골짜기에서 컨테이너 하나 놓고 시간경 성무일도와 하루 여덟 시간 땅 일구는 노동으로 노년을 보내는 일상을 들려주신다. 한 사제의 아프고도 따뜻한 삶은 언제나 한 편의 드라마다. 은퇴시기보다 무려 10년을 앞당겨 사목현장을 떠나 바람과 바위만 널린 저 태백산맥 골짜기에서, 밤새껏 하느님과 씨름하던 야곱처럼, 하루 종일 자신과 씨름하는 노사제의 삶이어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총대리 10여년에 “위에서는 메주가 떨어지고 아래서는 목침을 치대고 올라오는” 틈새에서 간이 썩어 터져버렸다는 얘기에서는 하루 종일 허리통만한 바위를 들어 올려야 하는 그분의 일상이 하느님을 매치다 고두리뼈가 나가듯이, 날마다 영적인 씨름을 계속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라틴어 박사 보스코와 더불어 “기도하고 일하라! 그러고서도 사랑하라! 삼위일체처럼 일치 속에!”라는 당신 좌우명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있는 투박한 손길에서, 포콜라레 영성으로 노년을 꾸려가는 비결이 엿보이고 내년 여름에는 직접 찾아가서 그분의 삶의 현장을 보기로 약속하며 헤어졌다.
춘천을 떠나 11시에 청평에 사는 이콘 화가 최마리아 화백의 집에 들렀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 들어서자 집안 전체가 화가가 손수 그린 이콘과 프레스코로 가득차서 동방교회 성당이나 미술관에 들어간 느낌이다. 그 화려하던 CEO 활동(20년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의 마일리지로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을 청산하고 남편 이사악 선교사와 부부로 맺어진 인연으로 로마로 떠난 사연, 로마 비행장에서 처음 만난 수녀님의 산더미 같은 짐을 부쳐드린 인연으로 이콘 화가 허파치스 수녀님을 마나 이콘 화가로 운명이 바뀐 사연, 작년에 새로 지은 안동교구 주교관 경당 두 군데를 도맡아 설계와 장식, 자기의 프레스코로 가득 채운 사연을 입담 좋게 풀어가는 화백의 얘기에 우리 둘은 정신이 빠졌다.
굽이굽이 흐르던 그 곡절 끝에 “모든 것이 하느님이 마련하신 길이었고 은총이었다”는 고백이 나왔다. 그렇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닻 내리고 돛 감을’ 무렵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파악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신비임을 최화백의 삶에서도, 노사제 김택신 신부님의 삶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우리가 온다고 그니가 정성껏 차려낸 점심을 푸짐하게 먹고서 2시경 청평을 떠났다. 대전 몰에 들러 추석장을 보고나서 포근해지는 마음으로 지리산으로 달려오는 고속도로, 대보름으로 커가는 반달이 길안내를 하면서 앞서 달린다.
집에 오니 8시. 고마운 분들이 보내온 추석빔들이 상자상자 쌓여 있고, 그 속에는 분도출판사의 교부총서 신간, 아우구스티누스의 「아카데미아학파 반박」도 보스코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스코의 일곱 번째 역주서(譯註書)다.
그가 소파에 누워 책을 훑어보는데 휴천재 건물과 지리산 전부가 흔들리는 소요가 지나가고 조금 뒤 “경주에서 강도 5.8의 ‘대지진’이 났다”는 속보가 떴다. 내 평생 처음으로 지진을 몸으로 느끼고 대지의 여신 ‘가이아’ 여신의 신음소리를 귀로 들었다. 속보에 접하고 걸려온 몇 통의 국제전화는 ‘나랏님 죄가 커서’ 일어난 천재지변이라는 해석이 따라붙었지만 내일쯤 관제언론들은 ‘김정은의 핵실험’에다 탓을 돌릴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