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7일 수요일, 흐림
보스코가 없으니 집안이 썰렁하다. 나만 있는데 기름보일러 돌리는 게 아까워 몸으로 떼웠다. 전기방석 하나로 냉기를 달래 본다. 그래도 몸속의 피가 돌면서 온기를 열심히 실어 나르니까 차츰 추위가 가신다. 아침으로는 삶은 계란 한 알을 칼로 반을 갈라서 파먹었다. 부지런한 여자가 혼자 남으면 보통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중이지만 게으른 남자 보스코와 별반 다르지 않은 행동이다. 그래서 부부는 함께 살면서 본인이 어디까지나 ‘반쪽’임을 확인하고 둘이 합쳐질 때 비로서 ‘온전히 하나’라는 이치를 겸손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반쪽만으로도 넉근하다고 우쭐대는, “잘난 남자나 잘난 여자들이여, 잘난 척하지 말지어다.”
오전 내내 생각의 힘을 키워주는 「고전 공부법」을 읽었다.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전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그 이유를 섬세하게 일러준다. 대부분의 책이 이미 읽은 것이지만 ‘생각하며 사는데 이런 책들이 왜 필요한가’를 다시 살피게 만드니까 이 가을에 좋은 책이다. 꼭 그 원서들을 다시 읽어야겠다. 지난번 이미 읽은 책, 한나 아렌트의 책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관찰하던 대목을 회고하며 요즘 한국사회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유대인을 400~600만명을 학살했다. 그런데 그들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 아이히만은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손으로 누구를 죽인 일이 없고, 국가의 명령에 복종했으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한다. 요즘 정국이 하도 심하게 흔들려 시골 아낙도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무슨 폭탄이 터질까 걱정스러워 차마 눈을 뜨기조차 무서운데, 정작 그 일을 저지른 자들은 양심에 가책을 전혀 못 느끼는 뻔뻔한 말을 공공연하게 지껄인다. 한국 땅에 아이히만들이 저토록 많이 산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친다. 광주학살을 저지르고서 “난세(亂世)를 치세(治世)로 바꿨을 뿐!”이라던 집단이 그대로 권력을 쥐고 있다.
자기들이 한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이었는지 도덕적·윤리적으로 생각하는 기능을 잃어버렸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자기들이 그 짓을 하면 이 나라가, 국민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도 못하는 무리가 되어 버렸다. 이 순간에도 오로지 권력과 돈에 매어 파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본다. ‘통일교 회견’에서 최순실이 ‘죽고만 싶다’는 푸념을 했다는데 저자들은 자기네가 실제로나 사회적으로 죽인 타인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좋으련만…
서울에서 보스코가 2시쯤 함양에 도착했고, 3시에 이탈리아인 친구들이 부산에서 왔다. 베니스에 사는 폰타나네가 한국에서 입양해서 키운 안나가 자기 회사동료라며 한국엘 간다니까 잘 부탁한다는 전화를 해 온 젊은이들이다. 이태리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바니아도 죠르죠도 아주 순박했다.
우리는 우선 지곡의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을 함께 둘러보았다. 부산 동아대학에서 온 학생들이 찾아와서 ‘선비정신’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실제 선비정신은 ‘젠틀맨쉽’으로 자기네보다 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에서 생겨날 텐데…
외국인도 저항감 없이 먹을 음식을 찾다 보니 다시 ‘샤브향’엘 가게 됐다. 이태리에서는 집밖에서 바베큐는 해먹어도 식탁 위에서 물을 끓여 채소와 고기를 익혀먹는 게 흥미로운지, 점심을 제대로 안 해선지 맛있게들 먹었다. 옆집 ‘콩꼬물’에 가서 눈꽃빙수도 사줬는데 이태리에 없는 음식이라며 흥미 있게 먹었다.
다행히 함양문화회관에서 안숙선 명창의 ‘토선생 용궁가다’는 공연이 있어서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 고유한 악기 연주를 보여주면서 이탈리아 사람들이 뭔가 우리 문화에 접할 기회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 짐을 풀게 하니 11시가 다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