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폭력적 공권력은 악귀나 다름없다.
그 악귀는 지금 한 농부의 생명을 끊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주검을 놓고, 자신들의 잘못을 호도하려고 별 짓을 다 저지르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나 추모의 장을 마련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정숙한 예의를 갖추어야 할 마당에, 이 정권은 수천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그 최소한의 예의마저 지키지 못하게 하는 포악무도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산 이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위령성월을 앞두고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정한다. 위령성월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특별한 신심 기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위로’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특히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이 정화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살아 있는 이들이 희생하고 선행을 베푸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톨릭 교회가 정한 위령성월에는 어떤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는가?
11월 위령성월 기간 동안 살아 있는 이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먼저 간 모든 성인들이 현세를 사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음을 믿고 기억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이다. 또한 신자들이 살아생전 하느님과 맺은 친교는 죽어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즉 하느님의 백성은 죽음이 끝이 아닌, 생과 사를 초월한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하나도 틀린 문장이 아니다. 또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이렇게 굳게 믿고있다.
그런데 막상 돌아가신 분들에게 드리는 위령기도가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일반적인 서술로 위령성월을 표현하기가 좀 멋쩍은 시대이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분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못하게 하는 패악무도한 정권이 버젓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빛과 소금은 상징어 이기도 하지만 물리적 실체이기도 하다. 교회는 실제로 빛을 비추어야 하고 소금을 세상에 ‘확’ 뿌리기도 해야 한다. 인간 사회의 공동선을 해치고 있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교회는 세상에 뭔가 고함을 쳐야 한다. 교회가 책망을 하지 않으면 권력은 부패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걷잡을 수 없는 정권의 전횡은 교회의 방관이 초래했다. 음습하고 썩은 곳에는 빛과 소금이 필요하다. 교회가 그저 신앙인들의 안전하고 편안한 요람일 수만은 없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죽은 이유는 불의에 항거해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누명을 쓰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억울한 죽음이다. 백남기 임마누엘⑴의 죽음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예수(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다.
한국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에게, 헤로데라는 포악한 전제왕권에게도 통렬한 비판을 가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불사한 고함’까지 바라진 않겠다. 그저 그냥, 귀 기울여 억울한 이들의 소리를 들어 주시길 바라고, 그 소리를 들었다는 작은 표시라도 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이런 한심한 시절에 위령성월에 맞추어 위령기도를 어떻게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느님 나라에 폭행을 가하는 권력자들을 쳐부수는 기도가 먼저 아닌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위령기도인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함인가? 양떼를 늑대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목자의 첫번째 임무이다. 교회의 목자는 울타리 안에 있는 99명의 신자들보다 울타리 밖에 힘이 없어 뒤쳐진 한 사람의 약자를 더 찾아다녀야 한다. 교회는 부당한 권력에게 무참하게 당하여,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 교회에는 그 어떤 권력도 함부로 못하는 권위가 생긴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슨 권위로, 어떻게 위령성월을 양들에게 설파할 것인가?
현재 이 나라는 합법을 가장한 권력의 치졸함이 도를 넘어 토악질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 끝을 보아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긴 하다.
죽은 이들에게도 천부의 인권이 있다. 인간사회에서 영혼을 떠난 주검에 대해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한 인간의 죽음은 어찌됐던 모든 인간적 책임에서 벗어난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도 일단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죄과를 물을 수가 없다. 그의 죄과와 별도로 그의 인권도 그대로 존재한다. 하물며 한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무도하게 끊어놓고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그 죽음을 왜곡하려는 이 폭력적 인권 유린의 현실이 더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11월 위령성월을 맞아 이 파렴치한 정권에 희생된 백남기 임마누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한다. ‘하느님은 영적으로 죽은 ‘파렴치한 사람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부활을 믿고 ‘회개하며 사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란 사실도 함께 깊이 묵상한다.
불의의 시대에 소금을 ‘확’ 뿌리신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음에 대한 좋은 준비는 나날이 이 믿음을 깊이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음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 하느님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 준비이다
이 말씀처럼 ‘죽음에 대해 좋은 준비를 할 수 있는’ ‘편안한 나라’가 정녕 이 세상에 있는가? 이 폭력과 야만의 시대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립보의 간청을 우리의 간청으로 바꿔본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제발’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⑴ 임마누엘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