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9일 토요일, 흐림
로젠택배 아저씨의 전화. 문앞에 상자를 놓고 가겠단다. 요즘은 가끔 보내는 사람의 주소도 없이 물건이 도착하여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온 길손 같아 당황스럽다. 산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루 종일 창밖을 봐도 가끔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새들의 날개짓이 마음의 창을 노크하는 소리 전부일 때가 있다. 그러다 택배 아저씨라도 오면 하나의 ‘존재’와 마주치는 순간이다.
보통으로는 택배기사들이 종일 하는 노동 때문에 지치고 고달픈 얼굴로 물건을 건넨다. “무거우시겠네요. 이쪽으로 놔주세요. 따뜻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죠” 아저씨는 말하기도 버겁다는 표정으로 물건이 가득 찬 트럭 안을 손가락질하곤 한다. “저걸 다 배달하시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네요. 그럼 어여 가세요”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건 낙엽뿐이 아니다.
길거리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박스를 내려다보며 보낸 사람부터 확인한다. 그 다음 내용물을 살핀 후 박스를 뜯는다. ‘택배아저씨가 보는 앞에서 뜯어 파손 여부를 확인시키고 사고가 났으면 반품을 요구하라’는 말을 듣지만, 시골에서는 그리 영악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깨졌을 땐 깨진 대로, 쓸 만큼 쓰거나 먹을 만큼 먹고 나머지는 통과. 힘든 택배 아저씨의 구부정한 어깨에 ‘반품 거절!’이라 쓰여 있다.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할매들이나 중학교만 나온 구장 아저씨도 그런 글쯤은 읽을 눈이 있다.
오늘 온 택배는 진양에 사는 보스코의 지인이 보낸 단감이다. 박스를 뜯으니 굵고 탐스런 단감이 벙글 웃는다. 단감을 좋아한다는 미루가 오면 몇 개 나눠 주고, 이웃 할매들이 지나가면 불러서 함께 까먹어야지... 우선 옆집 진이네 집에 몇 개 갖다 주고, 보스코에게도 한 개 깎아다 책상에 놓아주었다. 올 여름이 뜨거워 가을을 이리 달게 익혀놓았나? 가을이 입안에 아삭하게 가득 물린다. 마을엔 집집이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가을에 피어난 꽃나무다.
보스코가 텃밭 주위로 열려 있던 호박을 다 따서 밀차에 실어 끌고 왔다. 함양 장으로 이고 가서 좌판이라도 펼 분량이다. 그 동안 나는 오늘도 줄기차게 살아남아 죽을 때까지 배추 잎을 씹는 가여운 생명들과 술래잡기를 한다. 오늘 못 찾은 놈들에겐 “꼭꼭 숨어라, 내일 아침 찾으마!” 하고는 올라왔다.
유노인네 논에 동네에서 꼴찌로 콤바인이 벼를 거둬드린다. 예의 그 한남마을 트리오! 우리 대문을 들이받은 그 사람들이다. 유노인네 아낙이 없으니 새참도 물론 없다. 부지런히 커피를 끓이고 간식을 준비해서 내다드렸더니만 선머슴 같은 그 집 며느리가 왜 자기네한테 이리 잘 해주냐며 자기네 동네 오면 막걸리 밖에 없단다. “나 그거 겁나 좋아하는데”라고 했지만 그 말 듣고 그 며느리 우리 집으로 막걸리라도 사들고 올까 겁난다.
검찰이 특수부를 만들어 ‘최순실 게이트’를 조사한다니 소도 웃겠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검찰이 나서면 모든 것이 덮인다. 국회가 특검을 하게 되면 장물을 어디다 숨길지 앞질러 처리하는 작업일 게다. 하필 토요일에 청와대에 들어가 압수수색을 하는 시늉이라니! 짖는 시늉은 하는데 저렇게 꼬리를 치면서 짖으니... “최순실 일가도, 문고리3인방도, K.미르(우리 ‘귀요미’가 이번 게이트로 젤 피해를 본 건 자기[미르 - 미루]라고 푸념이다)도 조사해보니 아무 혐의 없음”이라거나 “본인들이 범법인 줄 몰랐다고 함”이라며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할 게 뻔하다. 개는 주인을 물지 못한다, 더구나 주인이 싸놓은 똥 먹어치우는 똥개는.
간식이 다 떨어져 생강 쿠키를 굽는데 회의 차 로마에 왔던 빵기가 빵고랑 함께 30여년 전에 살던 오스티아로 내 친구 까르멜라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며 카톡 전화를 해왔다. 오븐에서는 과자가 타고, 까르멜라는 서른 해 자란 두 아이를 반가이 맞아 내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고, 어둠이 내렸으니 보스코에게 저녁도 차려줘야 하고...
텅 빈 논들마저 내년 봄까지는 휴가를 보내는데 주부로 방방 뛰는 내 휴가는 어디쯤에 숨어 있나... 오늘 빨래 마른 것 다리미질까지 하고 나니 11시에 일기장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