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휴천재일기] “산기슭에 버려진 외딴 집 한 채”
  • 전순란
  • 등록 2016-11-02 10:20:18
  • 수정 2016-11-02 10:21:00

기사수정


2016년 11월 1일 월요일, 맑음


맑은 가을하늘이 돌아왔다. ‘모든 성인의 날’이니 아직 시복도 시성도 못 된 ‘맘마말가리타’ 곧 내 영명축일이기도 하단다. 오랜만에 햇살이 눈부셔 공소에 내려가 이신부님께 내드렸던 이부자리를 차에 싣고 올라와 테라스에 널었다. 사다드렸던 제습기도 들고 올라왔다. 덮을것과 베갯잇은 동생수녀님이 깨끗이 빨아놓고 갔으므로 요호청만 벗겨 빨아 널었다.



점심 후 이 근방에서 보스코가 제일 좋아하는 산보 길로 나섰다. 마을 아래 학교에서 평생 일을 보다 퇴직한 ‘강 아저씨’를 만났다. 보스코를 보자 반가이 인사를 한 후 송문교 다리께에 공중화장실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노라는 말을 한다. 다리께로 지나 다니는 사람이 많아 화장실이 없어 힘들어한단다. 몇해 전까지는 둘레길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마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펜션을 짓고 군에서는 서둘러 융자를 해 주었고, 도에서 대주는 돈은 마을에다 난데없는 커다랗게 펜션촌을 지어 올렸다. 그런 시설은 머지않아 이장이나 세도 있는 사람의 개인소유로 바뀌고... 사람들 말마따나 “눈먼 돈이니 먹는 사람이 임자”라고 했다.


시골생활을 눈여겨보면, 특히 영남에서는, 턱도 없이 지원이니 융자니 하면서 돈이 굴러다니고 관과 결탁할 줄 아는 요령 있는 사람들은 용케도 그런 뭉칫돈을 잘도 ‘따 먹는다’. 저 하급공무원들까지 철저하게 썩어 흐느적거리는 나라여서 대체 어디서 그 썩은 물이 흘러내려오나 궁금했는데 요즘 TV에 처음으로(8년만에 KBS, MBC, 종편에서 처음 내보내는 뉴스들이다) 보도되고 있듯이 맨 꼭대기가 철두철미 썩은 송장이어서 저 바닥까지 고스란히 추기물이 흘러내림을 본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이 거저 생긴 게 아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느라 화려한 산국과 쑥부쟁이와 맑은 하늘 아래 지리산을 바라보면서 귀와 눈을 씻는다. 두세달 만에 걷는 길이지만 농로가 군데군데 넓혀지고 축대가 쌓여져 있다. 묵정밭이 저렇게 늘어나는데 이 샛길을 이렇게나 확장해야 하나, 의아스럽지만, ‘공사해야 (돈) 떨어진다’는 공무원들의 신념이 여전하다.


산보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황선생의 슬픈 집터’가 있다. 작년까지도 그가 파놓고 간 연못에 샛길로 이를 수 있었는데... 한길로 자라 오른 억새와 철망처럼 퍼진 야생복분자를 헤치고 들어가 보니 연못에는 갈대만 무성하다. 그 남자가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한 여인이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건너편 지리산과 저 아래 휴천강 계곡을 내다보았을 창문 두 짝만 덩그러니 벽에 붙어 있다. 창밖은 쑥과 산국이 키를 훌쩍 넘는다. (관련글보기)




그 집앞에 쌓은 돌은 나에게 늘 '망부석'을 연상시킨다



산기슭에 버려진 외딴 집 한 채,

어느날 가보니 저 혼자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이 집에 살던 주인이 다시 돌아오나 안 오나

처마 끝으로 고독한 목을 빼고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집 없이 떠도는 옛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두 눈으로 바라볼 게 없도록

도무지 그리울 것도 사무칠 것도 없도록

단 한번에 기둥은 무릎을 접고 서까래는 상의도

없이 고개를 꺾고 봉창은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안도현, “주저앉은 집”에서)



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은 누가 돼지막을 하다 그대로 버려둔 폐허를 지나고, 백연마을 물방앗간을 지나며 이조년 시인의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도 읽어보고, 휴천강가에 세워진 정자에도 올라가 보고, 정자에서 묵정밭을 지나 한길로 나오다 ‘도깨비방망이’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길가에 앉아 두 내외가 그 가시를 뜯어내느라 6·25 전쟁 후 햇살에 쭈구리고 앉아 괴춤 까고 이 잡던 두 늙은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상동 영자씨도 돌아가신 부면장님네 남원댁도 쯔쯔가무시로 고생고생하고 있다니 얼른 갈아입어야겠다. 저 사나운 도깨비방망이보다 더 무서운 게 가을 풀밭의 진드기였구나!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