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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광화문에 집결한 100만 국민의 ‘대동세상’에서
  • 전순란
  • 등록 2016-11-14 1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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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2일 토요일, 흐림


세종로와 그곳으로 연결되는 서울시내 모든 길이 조선시대 이전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때는 마차라도 다녔겠지만 오늘은 모든 차량이 끊기고 인파가 가득히 그 길을 메웠다. 함성, 함성, 함성, 분노의 함성이 촛불과 함께 뜨겁게 타오르는데 그 분노의 횃불을 든 사람들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어서 정말 놀라웠다. 이기적이고 사회정치 문제에 무관심하다고 여겨지던 젊은 세대를 이 자리까지 끌어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고맙기도 하지만 가슴 아픈 사연이다.


한국 정치사회의 암담한 현실과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여 대한민국 수도를 점령한 100만 대군을 이루었다. 이 땅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데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 박힌 암덩어리들이 국민에게서 마지막 숨결을 걷어내려 맹위를 떨치는 중이다.


보스코는 오전에 집을 나섰다. 11시부터 가톨릭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갖는다. ‘평화신문’이야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신자들의 양심을 도닥거려 눈감고 귀 막고 두 손이나 비비며 기도하라는 투로 지면구성을 하지만 대구에서 나오는데도 ‘가톨릭신문’은 수년전부터 신앙인들이 사회문제에 눈뜨게 지면을 꾸려 보스코가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서는 명동본원에 와 계시는 노유자 수녀님을 만나 점심을 대접했단다.


오후 2시부터는 서울대교구청 5층 강당에서 ‘서울가톨릭상담심리학회’에서 영성 특강을 하였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어를 바탕으로 상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자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성을 심어주는 장장 3시간의 강연이었다.





그 동안 나는 집에 남아 내 일을 했다. 우리 부부가 늘 함께 다닌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안보이면 대부분이 “사모님은 왜 안 오셨어요?”라고 묻는단다. 남편이 운전을 못해 기사가 되어 운전봉사를 하는 길인데 그의 강의를 모니터링하는 역할도 된다. 부부가 함께 강의하는 손엘디 선생님 부부만은 못하지만 보스코의 일을 모든 점에서 함께 나누는 셈이다.


80년대 로마의 에우제니오 마싸 교수님(중세라틴문학)도 연구와 강의 말고는 만사를 아내에게 맡기고 사신다는 촌평을 사모님의 입에서 들은 적 있다. 그분도 운전마저 못해서 강의시간마다 부인이 차로 모시고 와서 캠퍼스에서 책을 읽거나 가까운 데서 시장을 보시곤 했다. 그러다 부인이 60대에 돌아가시자 교수님은 영락없이 엄마 잃은 아이의 모습이었고 그 반듯하던 차림이 후줄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뭣을 해도 의욕도 의미도 재미도 없다”시던 한탄이 기억난다. 우리 보스코가 딱 그 모양이 되리라는 노파심에 내가 더 조마조마하다.


보스코가 강의를 끝낼 시간에 맞추어 그의 구두를 갈아신길 운동화를 배낭에 짊어지고 명동으로 나갔다. 강연 후 토요특전 미사가 있었고, 학회장 한철호 신부님, 연수위원장 박란희 수녀님, 회계담당 남은정씨가 명동의 ‘진사댁’이라는 점잖은 한식집에서 우리 부부에게 융숭한 저녁을 대접해 주어 고마웠다. 한 신부님은 우이성당에 부모님이 다니신다 해서 더 친근히 느껴졌고, 남베아트리체씨는 살레시오수도회 협력자이기도 해서 더더욱 반가웠다.


한때는 민주화의 성지였다는 명동, 더 이상 민중이 찾아오지 않는 고요 


오늘의 민중총궐기 시위는 명동 옆 을지로부터 세종로, 종로, 서울역, 시청앞, 광화문을 사람으로 가득 채워 그 널따란 거리와 거리가 그렇게 서로 가깝다는 걸 처음 알았다. 차 한 대도 없이 온통 사람이어서 시청 앞으로, 광화문으로, 마지막에는 안국동 전철역까지 걸으면서 100만의 국민이 운집한 웅장한 역사적 현장에 함께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커다란 화면 앞에 주저앉아서 전국에서 모인 연사들의 연설도 듣고, 이승훈이 부르는 노래도 듣고, 내가 싸간 귤도 나눠주고 그 대신 옆 사람이 주는 삶은 달결도 얻어먹고 하니 완전히 ‘대동세상(大同世上)’이 거기 있었다. 국민이 살아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국민의 한 사람임이 자랑스러운 저녁나절이었다. 박근혜만 끌어내리면 대축제가 되겠다.


을지로


시청 앞


광화문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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