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1일 일요일, 맑음
‘대충씨’가 긴 여행에 피곤했던지 공소예절이 끝나는 시간에 도착했다. 뭔가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선지 공지사항이 끝나자 손을 들고 일어선다. 이번 유럽 여행에서 재작년 노환으로 한국에서 보낸 30여년 선교사생활을 접고 영구 귀국한 독일인 헤드빅 수녀님을 수녀님의 고향 양로원에서 뵙고 왔다는 얘기다. 두 부부는 수녀님이 한국에 계실 때도 심정적으로 가까이 지냈기에 열흘의 짧은 기간 중에 하루를 수녀님 뵙는 일에 냈을 게다.
움직이지 않아 몸피가 불은 점 외에 건강상 특별히 나쁜 곳은 없고, 한국에서의 소상한 일은 놀라울 정도로 기억을 잘하시는데, 가까운 시간에 일어난 일은 기억을 못하시더란다. 예를 들면, 자기들과 면담하다 11시 30분에 ‘손님 오셨으니 점심 부탁하고 오겠다’고 나가시더니 한참 지나 올라와서는 ‘나는 식사를 했는데 점심은 어떻게 했느냐?’고 묻고선, 당신이 손님 점심을 해달라고 준비해뒀는데 안했느냐고 오히려 화를 내시더란다. 먼 길 가서 차 한 잔도 못 마시고 일어섰지만, 그 상황을 보고서야 고국으로 잘 가셨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첨엔 ‘이렇게 맑은 정신이면 한국에 계셨어도 됐겠다’ 싶었으리라.
내가 여러 해 전 ‘요양보호사교육’을 받을 때였다. 실습 받던 병동에 깔끔하고 명랑한, 음악교사 출신 70대 중반의 아줌마가 있었다. 말하는 것도 조리 있고 경우 바르고 흠 잡을 데 없는 분이어서 왜 저런 분을 자식들이 요양원에 맡겼을까 의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잘 드는 남쪽 창가에 앉아 나한테 당신이 합창단 지휘를 했던 시절 얘기를 하는데 ‘베이스 파트는 요기 요롷게 요롷게 서고’, ‘알토 파트는 조기 조롷게 조롷게 서고’, ‘테너 파트는 요롷게 요롷게’, ‘소프라노 파트는 조롷게 조롷게’ 라면서,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로 물고기가 물을 가르고 올라가는 손동작으로 각 파트가 설 자리를 설명하는데, 턴테이블에 바늘이 걸려 못 넘어가는 음반처럼 한 얘기를 하고 또 하며 끝이 안 보였다.
정신병원에 가면 거기 수용되어 있는 사람치고 자신에게 정신이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에도 이해가 간다. ‘나는 정상이다’ ‘당신네와 좀 다를 뿐이다’ 생각할 따름. 노쇠에서 오는 치매와 건망증은 종이 한 장이지만 대단한 차이다.
얼마 전 읍내 친구가 시아버지가 당신 돌아가시면 공덕비를 세워달라 하시더라며 난감한 얼굴이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분으로 성실하게 사셨으니,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세워 드린다고 해! 돌아가시고 나서야 안 세워도 가신 분이 뭘 아시겠어?”라고 했다. “안 돼. 시할아버지 돌아가시자 당신 마나님 고생했다고 효부비를 세운 분이야! 우리가 ‘네’ 라고 대답하는 순간, 당장 어디서 글 받아 오시고, 돌 구해 오시고, 석각까지 다 해 놓으시고 ‘자, 나 죽거든 이거 세워라!’ 하며 확실히 하고 돌아가실 분이야.”
비석 세우는 데 필이 꽂히셨나? 공덕비야 주민과 후손이 알아서 세울 것이고, 묘비에 거창한 송덕문을 적는 일도 자식들이 맘에서 우러나 세우는 거 아닌가? 저것도 노망의 한 가닥 아닐까? ‘내가 살아온 얘기로 말하자면 소설 열두 권은 써야 해’라는 노인들도 그렇고… 보스코보다 세 살 많은 노인이라니 삼년쯤 지나면 보스코도 나한테 자기 공덕비 세워 달라 할까? 아들들이 들으면 웃을 테고, 나라도 3년짜리 적금이라도 들어야 하나?
늙을수록 잘 늙어야 ‘늙은이’ 대신 ‘어르신’이라 불린다는 말이 남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가 될 나이가 됐다. 박근혜가 나라 망쳐 탄핵까지 당하는 판에도 ‘불쌍한 우리 영애님, 우리가 살려내자’며 청계광장에 모여드는 저 늙은이들! 수십년 조중동에, 수년간 종편방송에 찌들대로 찌들어선지, 하야를 외치는 95% 국민을 서슴없이 ‘빨갱이’라고 부르는 ‘집단노망’을 TV 화면에서 목격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