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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세 살짜리 할아버지’
  • 전순란
  • 등록 2016-12-28 1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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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7일 화요일, 맑음


아침 식탁에서 시우에게 바게트를 잘라주는 보스코를 작은손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부이, 손 베요”란다. 내가 봐도 딱딱하게 덜 녹은 빵조각을 칼로 베는 솜씨가 불안하기만 한데 다섯 살짜리 눈에도 그리 보였나 보다. 보스코는 자칫 손가락을 입에 문다. 내게 들키면 멀리서라도 “여보, 손가락 좀 빼요. 어린애에요?”라는 잔소릴 거듭했더니만 작은놈이 슬쩍 눈웃음을 지면서 “에이~, 세 살짜리 할아버지”란다. 저렇게 놀림을 받아도 손주가 귀엽기만 하다.


아침을 먹다 큰애가 사과 조각을 방바닥에 떨어뜨렸다. 시우가 주워주면서 하는 말. “형아. 그냥 먹어, 버리지 말고. 내가 보니까 함무이가 진공소제기 돌리고 밀대로 밀고 물걸레로 닦으셨어. 깨끗하니까 그냥 먹어!” 두 녀석이 종일 방바닥에서 레슬링을 하거나 뒹굴며 놀기에 먼지라도 있을까 봐 청소를 했는데 녀석들 눈에도 좀 너무하다 싶었나? 손주 눈이 무서워서라도 할아버진 손가락을 입에 못 넣고 할머닌 바닥 청소를 좀 자제해야 할까보다. 이래서 노인들은 손주들과 함께 살아야 할 것 같다.



‘성씨 남자들’ 아침 풍경 빵고만 빠졌다


빨래 널기 총동원


내일 저녁에 온 가족 영화구경을 아범이 예약한다. 큰애가 ‘스타워즈’를 보겠다며 ‘12세이상 입장’이라니까 자기는 엊그제 24일로 12살(우리나이)이 되었다면서 “시우 너는 안 돼”란다. 시우가 그 말에 안 지겠다고 “형아, 누가 형아를 열두 살이라 보겠니? 작아서 열두 살처럼 안 생겼다”라고 응수한다. “그렇게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열두 살이라는 사실이 중요해. 그런데 넌 안 돼!” “그럼 나도 열두 살이다!” 작고 마른 체구여서 겨우 다섯 살로나 보일까 말까하는 여섯 살배기! 결국 ‘부모랑 함께라면 입장가(入場可)’하자는 판정에 다함께 함무이 하부이랑 극장 구경을 가기로 정했다.


아범과 어멈은 대학선배를 만나러 홍대입구로 나갔고, 시아와 시우는 함무이가 해 주는 점심을 먹고서 우리 동네 ‘둘리 뮤지엄’엘 갔다. 둘리 만화 작가가 쌍문동에 살았으므로 만화의 배경도 쌍문동이라는 게 아범 말인데 우린 알 길 없다. 빵기가 자라던 시절의 ‘짱가’는 우리도 봤지만, ‘둘리’는 빵고가 자랄 무렵의 만화인데다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감상을 못하고 넘어갔으니까... 두 손주는 ‘뽀로로’ 세대이고...


바깥 담벼락에 우리 이름도 있네?



우리집에서 정의여중학교까지 넘어가는 ‘근린공원’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보스코가 걸어서 넘어가고, 나는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사용 못하게 된 3G 핸드폰을 다른 것으로 바꾸러 가게로 갔다.


지난 세월 40년, 쌍문동 가난한 동네들은 ‘응답하라 쌍문동 1988’로 그려졌지만 빵기와 빵기가 어린 시절 우리 손에 끌려 많이도 산보를 갔고, 산너머‘꽃동네’에 찬성이 서방님이 번역일로, 동서가 피아노 교습으로 살아가던 수년간 ‘빵기’가 제 사촌 ‘꼬끼’와 ‘쫍쫍이’를 보러 넘나들던 산언덕이다. 선덕고등학교가 옮겨간 다음 그 학교를 다니던 빵기가 산길을 달려 철조망 밑으로 기어들어가다 훈육주임 ‘독사’에게 걸려 매를 맞곤 하던 추억도 서린 산언덕이다.



시우는 둘리뮤지엄을 나름대로 재밌어하는데 큰손주는 제 아빠한테 ‘별로였다!’는 촌평을 내놓는다. 소년티를 내는 나이니 다음에 만날 즈음에는 코 밑에 거뭇거뭇 수염이 나고 애늙은이 사춘기를 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즈음이면 저 귀여운 손주들도 ‘해외동포’로 낯설어질까? 손주들을 귀여운 맛으로 사랑할 만한 시간이 얼마나 짧은가,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게 인생이듯이!


한창 자라는 나이라 뭐든지 잘 먹는다. 밤중인데 배고프다는 작은놈 타령에 소시지빵, 찐빵을 데워오고 키위를 깎아 대령하는 며느리가 가엾다. 친정엄마라면 “내 딸 좀 쉬게 그만 좀 먹어라!”라는 말도 나올 법한데 시어머니에게서는 손주들만 대견해서 “그래 그래 많이 먹고 어서 크렴!”이라는 말만 나온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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