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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웅배] 새 해, 그리고 주님세례축일을 맞으며
  • 김웅배
  • 등록 2016-12-30 10:13:41
  • 수정 2017-01-02 17: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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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미문의 스캔들로 어수선한 연말연시가 지나가고 있다.


가톨릭 전례력에 따르면 1월 첫 주일이 주님 공현 대축일이고, 이어서 주님 세례축일을 끝으로 연중시기로 들어간다. 주님 공현대축일과 주님 세례축일은 카나의 혼인 잔치와 더불어 새로운 메시아의 출현을 공공연히 다룬 사건으로 전례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목자들 사이에 숨어있던(성탄)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에 의해 세상에(공현) 드러났다. 카나에서는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첫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메시아임을 증명하시고, 굳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반인과 함께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의로움을 이루시는 선례를 남기셨다. 게다가 명실공히 하느님이면서도 다시 하느님의 백성이 되시는 ‘겸손의 극치’도 보여주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마태 3, 13-15)


지난 대림시기와 성탄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은 엄청난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해괴한 일이 최고위 지도층에서 일어나 온 시민을 멘붕에 빠뜨렸다. 헤로데의 패륜적 행위를 신랄하게 고발한 세례자 요한처럼 백만 시민이 촛불을 들고 함성을 지르는데도 이 이상한 정권은 오불관언이다. 


대림시기에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백성들의 죄를 씻어준다. 회개를 하지 않고 그저 죄 사함만을 받으려 오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을 향해 큰 욕을 퍼붓는다. 하늘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고함을 친다. 그 역동의 시기가 지나고 메시아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셔서 세상에 공적으로 나타나시고 결국은 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기에 이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마태 3, 16)


세례를 받고 새로워진 하느님의 백성들은 회개를 통해 새로운 연중시기를 맞으며 새로운 마음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려고 한다. 그런데 이 땅의 지도자들은 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처럼 아무런 회개 없이 열매만 따 잡수시려고 한다. 


기득권을 행사하고 사회적 특권을 누리려면 거기에 알맞는 행동으로 기층민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규범과 법을 무시하고 자기희생 없이 기득권만 챙기려고 하니 저 바리사이나 사두가이와 무엇이 다르랴? 두드러기로 병역의 의무를 거르고 입으로만 국가안보를 거론하는 자에게 철면피라고 하는 말은 이제 비난의 소리도 아니다. 적반하장, 인면수심, 후안무치, 파렴치 등등 함부로 아무에게나 쓸 수 없는 단어들이 늘상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흔히 올리고 귀에 들린다. 더 나아가 이제는 하도 귀에 익숙해져 좀 더 자극적인 단어를 찾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이러다간 본래의 뜻이 사라져 사전에 뜻풀이를 다시 써넣어야 할 판이다. 


사실은 사실이 아니고 거짓은 거짓이 아닌 것들이 횡행하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아무도 진실을 믿지 않는다. 불신에, 불신에 의한, 불신을 위한 모리배들의 개차반 세상이 되었다. 본질이 흐려졌다, 물타기 한다, 본말이 전도됐다 등등 이런 말들도 한국사회에서는 부정적이 아니라 아주 당연하고 긍정적인 프로세스로 인정된다. 모든 이슈의 흐름은 당연히 그래야만 하고 그러려니 해야 한다. 


명백한 증거물이 나오면 일단 아니라고 우기고 출처가 어디냐, 얻은 경위가 의심스럽다는 둥, 본질과는 하등 상관없는 쪽으로 몰고 간다. 이 글을 쓰면서 면면히 떠오르는 뻔뻔한 얼굴들을 생각하면 토악질이 난다. 틀린 사실을 틀렸다고 뉴스 앵커가 얘기하면 틀렸다는 사실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틀렸다고 말한 앵커를 비난한다. 메시지보다는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이 일반화가 되어버려, 한참 각을 세우고 싸우다 보면 ‘우리가 왜 이러지’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37) 


우리 공직사회에서는 ‘예’와 ‘아니오’ 사이에 ‘모른다’ 와 ‘기억이 안 난다’라는 말이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예와 아니오’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 되어버렸다. 지난 번 국회 청문회에서 고위 공직을 두루 역임한 증인들의 ‘모른다’와 ‘기억이 안 난다’라는 말은 분명 악에서 나오는 것일테다. 

자신이 약속한 말도 그 다음 날, 바로 거짓말로 뭉개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자신의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고 말 할 수 있는 위인들이 이 나라 국정을 농단했다. 


절망과 불신의 시대에서도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는 우리는 주님의 세례를 통해 새 사명을 부여 받았다. 그 사명은 불신의 시대를 믿음의 시대로 바꾸는 일이다. 당신의 세례를 세례자 요한에게 믿고 맡기신 예수님처럼 믿음과 겸손을 키워 나가야 한다. 아울러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담대하고 분명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 ⓒ 최진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어둠에 자식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요한의 세례로서 평범한 인간이 되어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사회의 불평등이 상시로 존재하는 엄중한 이 시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사시면서 ‘하늘 문’을 여시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인간으로서 극한 고통을 받으셨지만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기억하고’ 또 ‘알면서’ 이 암울한 세상을 희망의 빛으로 통과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 17)



[필진정보]
김웅배 : 서양화를 전공하고, 199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지금까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에디슨 한인 가톨릭 성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 복음서를 컬러만화로 만들고 있다. 만화는 '미주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연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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