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
가톨릭 교회를 선택한 신자들은 타종교에 비추어 알 수 없는 종교선택적 우월감을 가진다. ‘나는 가톨릭 신자인 것이 자랑스럽다’, ’그래도 가톨릭이 깨끗하지 않느냐’ 라며 제일 바른 종교라고 생각하며 안심한다.
그리고 교회의 신자로서 일정액의 교무금과 감사헌금, 건축금 등을 내고 교회의 정해진 전례에 잘 참여하고,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특별히 교회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 않고, 본당에서 주어진 봉사에 열심히 한다면 신자로서 이상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유지하는 측면에서는 신자들이 이렇게만 한다면 모범신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대 데레사의 말씀에 비추어서 마지막 때에 ‘우리들이 실천한 사랑’에 대해서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의 신앙은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돌아보자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모든 것이 정형화되어 있고 제도화 되어 있다. 『가톨릭 기도서』에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기도해야 하는 양식과 기도문이 정해져 있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도 기도문이 정해져 있고, 정해진 기도문을 읽어 내려가면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번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예수의 삶을 의미 있게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느냐가 아니라, 또 그 분과 함께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이 지금 나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주었는가 보다는 성금요일 예식에 참여 했는가 아닌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절박한 생계의 문제로 주일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소규모 중소상인이 늘 가슴을 치며 미사에 가지 못하는 것을 죄스러워 하는데, 성사표를 가지고 온 구역장님의 “이번에도 성사를 보지 않으면 냉담자 처리가 된다”는 싸늘한 말씀에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진다.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하여 냉담자로 분류되고 신앙을 포기하는 신자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며, 사목자들은 미사에 나올 수 없는 많은 이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주일미사 한 번은 나와야 하지 않는가!’ 강론한다.
이해는 하지만 그런 절박한 민중들의 삶과 사제 수도자들의 삶은 이제 너무 많이 괴리되어 있다. 수도자들도 가난하다 말하지만 사실 그들이 입고 쓰고 먹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 아니다. 수도복에 그럴싸하게 걸쳐져 있는 가디건은 이름 있는 상표들이 많다. 껍데기들이 안과 밖으로 많다.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능률적인? 신앙
주일에 성당에 나와 하는 모임들은 동네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다. 여기에라도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사회 안에 있다는 안전장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는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존재의 불안과 해결되지 않는 감정들을 투사할 대상을 찾아(흔히 공동체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뒷담화를 시작한다.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유독 한국사회가 이웃사촌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어려움이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는 아니겠지요’ 라고 말한 이스가리옷유다처럼 나의 행복과 안전에 대한 바로미터로서 타인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왜 한국인들은 연예인들의 뒷얘기에 이리도 흥분할까? 왜 유명인들의 개인생활에 지독히도 관심을 가질까? 왜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은 사제들에게 이리도 많은 의존과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한국사회 가톨릭교회 신자들의 마음은 어떻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교우들은 관계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지나치게 현실의 이익에 집착 한다. ‘친구가 된다는 것(menein)’은 ‘함께 머문다’는 것인데, 모두가 교회 일에도 분주하여 함께 머물 수 있는 시간조차 없다.
그리고 무심한 듯 하지만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상을 틀림없이 기대한다.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는 사람들이 특정한 사업을 하면서 교구장이나 사제와 친해져 교구의 여러 가지 사업에 참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것이 건전하고 상식적인 영업이라도 많은 신자들은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이 많다. 특별히 교회건축 등의 이권이 큰 사업들에 교구의 평협회장이나 경제인연합회 모임 회원들이 개입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나거나, 때론 경제인연합회 지도신부가 경제인들을 불러 골프 비용을 부담하게 하며 운동을 즐기는 것들이 신자들 간에 회자되며 교회 내 스캔들이 된다.
아는 이에게는 각별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각박한 내 집단 의식을 기반으로 한 배타적 인간관계주의의 원형은 혈연중심의 친족주의, 자기 식구를 우선시하는 가족주의로 응축되어 우리 사회 도처에 재현되고 있다.
끈끈한 가족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출생의 비밀을 소재로 한 드라마의 성행, 인사청문회에서 늘 문제가 되는 위장전입, 재산상속, 부동산 투기, 자녀들의 병역문제 등은 가족과 친족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그러나 산업화의 급진전에 따른 친족 공동체의 해체나 약화, 도시화, 개인화되는 주거 환경과 문화 등은 우리가 친지나 가족이 아니어도 같이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한다. 직장과 학연, 성당에서의 여러 단체 활동 등으로 만들어진 인간관계의 그물망이 크고 작은 친소관계로 구성되었다.
‘지금여기’ 당장 신앙: 폐쇄적 공동체로 발전해온 가톨릭 소공동체
유교가 고도의 사회윤리 체계로 간주되어 오랜 기간 삶의 원리로 작용해 온 동북아시아 지역의 한국사회에서 ‘지금 여기’ 라는 시간의 한정성과 공간의 제약은 현세 중심적 사고를 고착화시킨다.
‘죽고 나면 끝나버린다’ 라는 한정적 시간관은 그리스도교의 죽음 이후의 부활신앙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한다. ‘초월(trascendente)’에 대한 동경이나 신앙을 가능하게 하는 ‘경외(tramendum)’의 결여는 신앙을 절름발이로 만들 공산이 크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도 실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실리추구의 사고는 종교인들을 포함하여 정치인이나 지식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다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쁜 존재라는 속물형 인간관을 확산시키고, 사회적 신뢰나 자존감 상실과 같은 부작용을 초래한다.
거세개탁(擧世皆濁) 즉, “온 세상이 모두 탁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 있기 어렵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모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믿을 사람이 없다는 의식을 확산한다.
곧 모두에 대한 불신이 조장되고 ‘사랑’이라는 삶의 여러 가지 가능성이 차단된다. 그러니 언제 누릴지 모를 천국은 문제되지 않고 지금 나의 재산, 건강, 명예, 자식에게 복을 달라는 것이 주된 신심의 방향이다.
한국인의 복음 : 재산, 건강, 명예, 자식의 복
인과응보, 뿌린 데로 거둔다는 이치를 근간으로 하는 보상의식은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등의 종교원리로 작용한다. 인간은 모든 삶의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기를 갈망한다. 높은 사회적 자살률과 ‘묻지마 범죄’ 등은 ‘사회적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보상의식이 한계점을 넘어 파국에 치닫게 되는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복’은 친한 사람들끼리 한평생 만복을 원 없이 누리며 살아가는 것, 사회 경제적 영역에서 심신의 안녕에 이르는 안락한 삶을 향한 ‘지복의식’이라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
평신도들이 추구하는 ‘복’은 고난이나 구원을 통해 향유되는 은총과 같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요,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공적 이념과도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 ‘복’은 권력, 재산, 건강, 명예, 자식 등에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Good News)’은 현세에서 얻어지는 권력, 재산, 건강, 명예, 자식 등에 관한 행운이라는 다분히 기복적인 성격의 복음이 될 소지가 많다.
이러한 세계관 아래에서는 한, 정, 분노, 기쁨, 보람, 애환 등 만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요소들이 주체적 향유의 소재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 수동적으로 내려오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끼리끼리’(관계주의), ‘빨리빨리’(성취주의), ‘대충대충’(현세주의), ‘다다익선’(보상주의)이라는 깊은 내면 안의 생각들이 기복의식으로 총화 되고, 기존 사회지도층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발에서 그리고 승자독식의 경쟁적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 여러 가지 다층적인 생활의 전략들이 도출되었고 이것이 본당 공동체 저변에 흐르는 무서운 패거리 문화(관계주의)와 기복적인 마리아 신앙(현세주의)등으로 나타나 공동체 내에 분열을 만드는 요소들, 곧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 요소들이 되고 있다.
원만한 인간관계: 처세인가 사랑의 실천인가?
레지오 ‘쁘레시디움’(소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는 구역, 반의 소공동체(속지적 구조)를 뛰어 넘어 존재한다. 단체장이나 구역의 구반장들은 특별한 보상 없이 너무나 많은 노력봉사를 요구받고, 최근에는 맞벌이 부부들이 늘어나면서 아파트 거주지역의 여성봉사자 인력은 그마저도 고갈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목회 임원들, 단체장들도 특정한 운동을 같이 한다거나, 사제들의 취향에 따라 정치색, 문화, 놀이방식 등 코드가 비슷하게 형성된다. 여기에는 적당한 ‘처세’와 ‘융통성’이 필요한 것이지, 복음이나 사랑의 실천, 사회정의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 등은 이미 무거운 화제, 함께 있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깨는 소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복음의 선포는 참으로 어렵기만 하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은 연구하지만 성경은 연구하지 않는 신자분위기는 순전히 레지오 마리애 영성의 문제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본당 내에서 인원 동원력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로 볼 때 레지오 없이는 여러 가지 본당 운영에 어려움이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레지오에 모든 것을 맡길 수도 없고, 본당 사제는 끊임없이 레지오 마리애 신심과 갈등한다.
모든 것이 대부분 처세로 흐른다. 원만한 것이 최고다. 무엇인가 문제를 제기하면 ‘까칠한 사람’, ‘불만이 많은 사람’, ‘적응장애자’로 떠밀린다.
비전도, 목표도 사명도 없는 교구의 사목정책 : 문맹신앙인의 양산
이렇게 대다수의 교회 내 평신도들은 레지오 마리애, ME, 꾸르실료 등으로 대변되는 신심단체의 회원 ‘끼리끼리’의 인맥과 친교로 소위 영성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 성숙과 성장은 별개의 문제가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외적 성장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미숙성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평신도 신앙 교육활동을 소홀히 한 교회 당국의 사목 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설본당 부지를 확보하고, 성당을 신축하고, 교회 시설,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데는 많은 비용들을 투자했지만, 정작 신앙 교육을 위한 소프트웨어 기획, 제작, 운영비용은 전혀 투자하지 않는 교구의 정책은 교육의 질(質)의 저하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맹 신앙인’을 양산할 뿐이다.
최근의 이러한 평신도 신앙의 밑바닥을 치는 소위 대수천(대한민국을 수호라는 천주교신자모임)이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개입하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2013년 박창신 신부의 강론을 자구적으로 해석하여 ‘종북사제’, ‘종북주교’, ‘종북구현사제단’이라는 나름대로의 인식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집회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미사를 방해하고, 2014년 세월호 참사에서는 고통에 공감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보수논객들의 말을 받아 적어 ‘세월호 지겹다’, ‘국민세금 혈세를 낭비하는 세월호 유가족’, ‘시체장사’를 한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사회교리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한 대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치의 올바른 참여는 가장 적절한 자선’이라는 말씀을 잊었는가? ‘고통 앞에는 중립이 없다’는 말은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세월호는 어떻게 되었는가?’ 라는 교황의 말은 어디로 들은 것인가?
이러한 대수천의 논리의 기저에는 종교를 통한 자신들의 현실적인 욕망을 추구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종교는 비움을 통한 충만이지, 욕망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자신의 뜻을 종교를 통해 포장하며 강화시키려는 해괴한 논리의 전개는 일반 국민들에게도 신자들에게도 절대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 없다.
고통에 동참하던 신부들은 어느 새 좌익 신부가 되어버렸다. 브라질의 까마라 대주교가 말했듯이, ‘빵을 나누어주면 성자라고 불리지만 가난의 원인을 물으면 공산주의자로 불리는’ 것이다.
교구 사목정책은 먼 미래를 내다보며 장기적으로 기획하고 준비하고, 전문적인 인력의 양성과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함께 해야 할 것이다. 평신도가 병신도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