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화요일, 흐림
서울에서 보통 일기를 쓰고 나면 밤 1시. 그 시각이라도 아래층 엽이가 돌아오면 빠른 거고 3시가 넘어서 돌아오거나 밤을 꼬박 지새고서 귀가할 때도 있다. 늘 눈이 반쯤 감겨 피곤한지 휘청거린다. 얼마 전 걔 엄마가 하던 말. 모처럼 고향에 내려온 엽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엄마, 참 평화롭고 좋다. 나 시골로 내려와 살까?”하더란다. 그런데 아들의 그 한 마디에 엄마로서 비명처럼 “안 돼!”라고 했단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에 걸쳐 경향신문에 “게임산업 노동자 잔혹사 (1): 우리네 청춘 저물고 저물도록, 게임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제목으로, 엽이의 업종에 대한 기사가 났기에 관심을 갖고 읽었다.
‘구로 등대’라고 불리듯, 하루 24시간 불이 안 꺼지고 젊은이들이 일하는 동네. 게임산업이라는 게 사람의 두뇌가 생산 수단이고 끝 간 곳 없는 인간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기업주는 최고의 생산을 위해 필요에 의해 쉽게 해고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면서 그야말로 인간이 게임산업 생산의 부속품 정도로 취급 된단다.
밤 10시 퇴근은 ‘반차’, 밤 12시 퇴근은 ‘칼퇴’, 새벽 2시 넘어야 ‘잔업’이라니! 넷 마블에 머물수록, 회사가 성장할수록, 프로그래머는 괴롭기만 하단다. 그래서 어떤 퇴직자는 “판매 시장이 아니라 가족이, 회사의 성장이 아닌 행복을” 선택했단다. 지난해도 ‘구로 등대’에서 세 명이 죽었는데 두 명은 돌연사, 한 명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 했다는 얘기도 있단다.
그렇게 힘들여 만든 물건이 시장성이 없다고 졸지에 회사부터 사라지고, 직장도 잃는 게 다반사.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구글 같은 왕서방이 챙겨가는 비참한 현실. 개발자의 비애가 내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엽이한테서 일어나기에 가슴으로 느껴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이 소비자 측에서 즉 현실에서는 어른 아이 모두, 집에서는 남편과 아이 심지어 아내까지 게임에 빠지고 중독되기도 한다. 요즘 포켓몬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내 눈에는, 죄다 나사가 빠져서 빠진 나사를 찾아다니는 놀이로 보인다. 인간들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찾아 나서야 하는지 가치관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세상에 사는 기분이다.
점심에 소담정 도메니카씨가 왔다. 송목사 어머님이 보내준 ‘새싹채소’ 한 상자가 냉장고에 숨어 있어서 점심으로 날치알을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듬뿍 넣어 새싹비빔밥을 해서 먹었다.
식사 후 최근에 있었던 자기 지인의 죽음, 그 죽음을 신앙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자기 고백적인 얘기를 그니와 나누었다. 같은 죽음을 놓고 떠나던 이가 평소와는 달리 모든 것에 고마워하고 모든 사물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며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이는 그 죽음에 전혀 공포가 없는데, 평소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만을 보아왔던 사람의 방에 들어서니 옆에서 자기를 떠미는 거북함이 느껴지더란다. 죽은 이의 문제일까? 살아남은 내 느낌뿐일까?
늦은 밤 보스코와 그 얘기를 나눴는데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정말 악당(최순실처럼)이 아니라면, 모두 구원하시리라는(어쩜 최순실도) 결론이 나온다. 심판 혹은 영벌이라는 것은 오로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부끄러운 삶에 대한 끝없는 후회, 도저히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뜨거운 자책이리라는 보스코의 신학적 해석.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휴천재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다짐하게 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 「서시(序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