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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2017년 광화문의 정월대보름달
  • 전순란
  • 등록 2017-02-13 10:33:36
  • 수정 2017-02-13 10: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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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1일, 토요일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산속에 사니 얼마나 춥냐?” 그러나 지리산은 어머니 치마폭이다. 겨울이면 서울 보다 4~5도 따뜻하고 여름엔 그만큼 더 시원하다. 2000년 정월 우리 대모님 김상옥 수녀님이 휴천재를 찾아오셨는데 소녀 같으신 대모님이 뒷산 바위 밑 양지 풀섶에 소복하게 자라 오른 햇쑥을 보고 추위도 잊고 그걸 뜯어다 송편은 잘 해 잡수셨는데 감기도 함께 뜯어가서 한참 고생하신 적은 있다. 안 춥다고 깔봐서는 안 되지만 따뜻한 건 사실이다.


요즘도 밭에 내려가면 여기저기 성질 급한 봄풀들이 땅을 헤치고 세상 구경에 정신 팔고 나는 그것들 보느라 넋을 잃는다. 그 작고 여린 것들이 어떻게 저 동장군의 위력에서 살아남아 그 곱디고운 꽃들을 피워 올리는지... 삶은 좌절해서는 안 됨을 온몸으로 일러준다.



보스코가 2시에 강남구청 가까이 있는 예식장에 주례를 하러 간다기에 흰 와이셔츠에 옷을 말끔히 대려주고 구두까지 얼굴 비치게 닦아주었다. 서울에서는 흰 와이셔츠를 하루만 입어도 더럽다. “누가 이런 반(反)여성학적 의상을 남자들에게 입혔담?” 그래서 그것과 상반된 블루 칼라가 나와 노동과 사회의 저변을 형성하고 여성을 편하게 했나? 와이셔츠는 때색을 입겠다는 게 페미니스트 빵기의 발언이다.


12시에 보스코는 주례를 하러 간다고 강남구청역으로 떠나고, 나더러 잠실에서 3시 30분에 있을 결혼식에 가라고 일러둔 터여서 집을 나서 마을버스를 탔다. 버스가 쌍문다리를 건너는데 보스코의 전화가 왔다. 예식장에 가보고서 결혼식이 내일이라는 걸 알았다고, 이 교수네 결혼식도 내일이라며 집으로 돌아가란다. 나야 마을버스로 한 바퀴 돌고 집에 왔지만 식장까지 간 그는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단다.


그래도 하루 먼저 간 게 하루 늦게 간 것보다 낫다고, 강연 주최측에서 “다 모였는데 왜 안 오시나요?”하는 전화(서울에서 함양으로 걸려온)보다, “대사님, 강연은 내일인데요?”라는 대꾸가 낫다는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내 기억으로 지난 10여 년간 벌써 세 번째 일어난 헛걸음이다. 앞으로도 내가 안 챙기면 이런 일이 더 늘어날 테니 ‘자기 공부’ 외 모든 것을 담당하는 내게 ‘일정 챙기는 비서’ 역할 하나가 더 늘었다.




돌아오다 춥고 배고파 짬뽕 한 그릇을 점심으로 먹었는데 너무 맛이 없더란다. 그때 심경에 어떤 산해진미인들 입에 달겠는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시간을 세 시간이나 허비했으니? 그가 측은해서 저녁으로 팥죽을 쑤어 함께 먹고 순애씨 말대로 ‘굴러갈 만큼 옷을 껴입고’ 광화문 집회 현장으로 갔다. 국염씨에게 전화하니 혈압 때문에 너무 추워 못가고 최목사님만 나갔단다.


그래도 우린 이만큼 건강하니 역사에 책임을 다해야지! 훈이 서방님도 온듯한데 70만 명이 모인 자리라 전화통화만 하고 못 만났다. 김경일 원장님과 문정주 선생님은 겨우 만나서 반가워 얼싸 안고 행진도 함께 하고, 끝나고서는 우리한테 밤참과 차도 사주셨다. 두 분은 촛불 첫날부터 결석 한번 안한 ‘모범민주시민’이다.



밤참을 먹던 중 옆자리에 어떤 위인이 앉더니 우리한테 촛불시위 참가 인증사진을 보여주고선 느닷없이 “문재인과 안희정, 삼성의 앞잡이로 각기 50억과 30억을 받은 도둑놈들”이라고 큰소리로 횡설수설, 소위 ‘마타도어’라는 것을 시작했다. 문샘 부부가 강력히 항의하자 놀라서 밥값도 안 내고 도망가다가 쥔아줌마에게 걸리기도 했다. 역시 ‘끄나풀들’ 소행은 치사스럽다.


국정원 같은데서 일당을 받겠지만 선거철이면 전국 방방곡곡 다방, 식당, 시장을 돌면서 직업적으로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작자들이다. 지금은 시골 마을마다 생겨난 ‘노인정’이 그자들의 단골작업장이다. 촛불시위 현장에까지 저런 ‘꾼’들을 파견하는 것으로 미루어 국정원이 어지간히 똥줄이 타나보다. 헌재 쪽으로 행진을 하는데 어떤 아줌마가 보스코의 손을 덥썩 잡으며 “이렇게 어르신이 태극기 집회에 안 가시고 촛불을 드시다뇨?”라며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는 까닭을 알만했다. 


오늘 같은 강추위에 70만 넘는 국민이 광화문에 모여 추위를 뜨겁게 달구는 뜻은 오직 하나 민주를 향한 염원이다. 박근혜 ‘퇴진’을 써 올린 대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광화문길을 행진하는 기분이나 누군가 보내준 문규현 신부님 사진은 수고의 값이 되고도 남는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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