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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올해도 열매가 시원찮으면 모조리 잘라 버릴 테니 그리 알아!”
  • 전순란
  • 등록 2017-02-20 10:08:41
  • 수정 2017-02-20 1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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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9일 일요일, 맑음


아침 햇살이 산 너머로부터 퍼져 오르면 왕산은 화관을 쓴 멋진 왕자님이 된다. 저 산은 밋밋해서 참 무뚝뚝해 보인다. 아침 일찍 한술 뜨고 밥상을 싹 치우고 빈상을 내미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밋밋한 형상에 데면데면하다 그 상 가득 햇살이 담기면 나도 모르게 입이 절로 벌어진다. 너무 좋아서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



지난주부터 안식년으로 벽소령길 마리안나네 집에 머무시는 장 신부님께서 7시 30분에 우리 공소에서 주일미사를 해주신다. 보스코는 미사 없는 공소예절과 공소의 주일미사를 비교하면 구멍가게에서 단팥빵 한 개 사먹고 때우는 아침과, 한 상 가득 걸게 차린 밥상에 앉는 기분의 차이란다. 그는 역시 구교신자답다.


공소 가는 길, 겨울이 끝나가는 마지막 추위도 다 날아간 듯하다. 작년 이종철 신부님이 떠나신 휑한 자리를 손님 신부님이 채워주셔서 고맙다. 미사 강론에서는 산골에 살며 행여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지 모르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주신 저 위대한 대자연을 상속받은 기쁨을 잊지 말라고 일러주셨다.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북쪽 하늘을 가로 지르며 흐르는 구름까지, 우리 가슴이 터지도록 푸짐하게 마련해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절로 찬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제 밤 일기를 쓰는데 빵고 신부가 아씨시라며 전화를 해왔다. 공부하다가 머리를 식히러 가기에 알맞은 거리에 있는 도시 하나가 아씨시다. 로마 떼르미니 역에서 기차를 타면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데 어찌 보면 이태리 반도는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작은 도시도 몇 백 년 이상의 전통이 있는 두오모(중앙성당)가 있고, 그 앞의 널따란 광장, 박물관, 시청이 두어 시간 구경거리가 있다. 가게 하나하나, 모퉁이의 개인집까지 역사와 문화가 조화로이 서 있어 현대인의 지친 영성을 싸매준다.


재작년 미루네와 아씨시를 순례했던 기억이 생생하고, 그 문화에 심취해 발그레 열이 오르던 그니가 아직도 그곳 사진에 있다. 빵고가 점심으로 양고기를 먹었다기에 다음에 다시 가면 수바시오산 중턱에 있는 ‘라스탈라’(마굿간)라는 간이식당을 찾아보라고 했다. 텐트를 쳐서 만든 간이식 건물이지만 채소와 과일, 숯불에서 구워내는 파스타와 양고기, 후식이 아주 좋았고 무엇보다 지갑이 얇은 여행객들로서는 식당의 반값으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데다 포도주 값도 싸서 그 점을 이사야가 특히 좋아했었다.


빵고 전화가 끝나자 이번엔 빵기가 전화를 했다. 아이들과 스케이트를 타러 왔는데 꼬마들이 할머니에게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단다. 나야 무조건 OK. 얼음 위를 제법 시원스레 미끄러져가는 시아, 보조기구에 도움을 받아 발을 떼는 시우! 빵기, 빵고는 그 나이에 얼음이 없던 로마에 살았으니 스케이트도 스키도 탈 기회가 없었고, 나 어렸을 때야 사과 궤짝을 뜯어 바닥에 굵은 철사를 대서 만든 썰매가 전부였다. 눈 녹아 다시 언 길이나 추수 끝난 논바닥에 고인 물이 얼어 그 위를 작대기로 밀며 달리던 기억이 전부인데...



오후에 보스코가 배나무 가지치기에 착수했다. 작년에 퇴비주고, 꽃 따주고, 약 쳐주고, 봉지 싸주고, 미루와 이사야가 와서 방조망까지 씌웠는데 30그루 배나무에서 50개도 수확을 못해서 올해는 가지를 많이 쳐서 최소한의 수확만 보기로 했다. “만약 올 가을에도 수확이 시원찮으면, 성서의 돌무화과나무처럼, 모조리 잘라 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며 배나무에게 경고를 하고 올라왔다(하느님이 내 인생을 두고 이리 경고하신다면? 으시시하다). 농사란 때와 기다림의 반복이다. 때가 되면 씨 뿌리고 기다림으로 열매를 얻는다. 농부란, 아이를 가진 여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림이 우선해야 하는데... 배나무들한테 미안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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