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3일 목요일, 맑음
나마저 간밤에 잠을 들 수 없었으니 그들의 부모와 가족의 절절한 기도는 미루어 알 만하다. 2시에, 혹시 세월호를 묶은 줄이 끓어지지는 않았을까 일어나 확인을 하고, 3시 50분에 다시 일어나 세월호의 일부가 보인다는 속보를 보고야 안도의 깊은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날이 밝기를 기다렸던 많은 친구들이 전화를 해서 서로 감격의 기쁨을 나눴다. 우리가 TV를 거의 안 보는 걸 잘 아는 소담정 도메니카는 혹시 내가 모르고 있을까봐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며 전화를 해서 울먹였다.
3년 탈상을 앞두고, 더구나 부활절에 다시 세상을 향하여 몸을 일으킨 ‘진실’ 앞에 우리는 전율한다. 이렇게 이틀 만에 끌어올릴 배를 왜 3년이나 뜸 들였을까? 김무성은 박근혜가 너무 싫어해서 그니 앞에서는 아무도 세월호라는 말, 입도 뻥끗 못했다니 주변을 싸고 있는 사악한 간신무리와 함께 침몰해야 하는 여자이고, 침몰하는 저 작자들은 그 누구에게도 구조되지 못할 것이다. 떠오른 배를 보면 계속 눈물이 난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미안하다.
사순절이면 보스코가 이곳저곳, 특강을 하는데 4월 5일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에서 사회복지 책임자들에게 강연을 해달라고 총무신부님이 전화를 해 왔다. 정 신부님은 서품 후 첫 부임지로 우리 수유동 성당 제2보좌로 오셨다. 일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신학교엘 들어갔기에 사제 서품도 그만큼 늦었다. 그런데 좀 어눌해 보이는데다 차림도 남루하고 자동차도 없어 신부님에게서는 궁기가 흘렀다.
신부님을 불쌍히 여긴 여교우들이 행여 신부님께 옷 선물을 해도 가난한 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로 고스란히 넘어가고 신부님의 모습은 처음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어느 날 우리 집을 다니러 오신 신부님께 왜 차가 없냐고 물으니 당신은 그대로가 좋다며 우리 집에 타고 온 자전거도 길에서 주운 것으로 2만원을 주고 고쳤는데 엄청 좋단다.
당시 다른 보좌신부님은 ‘내 머리는 명동에서 3만원 주고 깎은 거야’, 혹은 ‘이 옷 무슨 무슨 메이커야’ 라고 자랑을 해서 교우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때라, 정 신부님의 태도는 자못 사제의 귀감으로 보이던 기억도 난다. 궁금한 여교우들이 참지 못하고 신부님 뒷조사를 할 수 밖에… 그런데 결과는, 강남의 유복한 집 아들로 공부도 좋은 학교에서 할 만큼 하고 신부님이 되셨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가난한 사제를 보는 신자들의 눈은 존경이 가득했다, 마치 프란체스코 성인을 보듯… 그때 신부님 밑에서 주일학교 초딩이던 빵고가 서품을 받고 40줄의 사제가 되었으니 먼 옛날 이야기다.
집에서 11시에 지리산을 떠났는데, 미루한테서 전화가 왔다. 천안 근처 어느 ‘꽁보리밥집’에서 '접선'하자고.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고 자기는 산청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견우직녀의 고리를 끊자고. 지난번 ‘세월호 1000일기도’(일주일 전 산청 원지에서) 때도 만나고도 세월호와 선거 경선 얘기도 나누고 싶었다. 언제 만나도 반가운 사람, 한 주간 넘으면 못 본지 너무 오래된 것처럼 보고 싶은 사람, 가슴에 고인 시국얘기를 원 없이 풀어낼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니에게 맛난 점심을 대접받고 헤어지는데도 아쉽다.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가겠다고 엄마한테 전화를 했는데 ‘유무상통’의 엄마 방에 들어서자 엄마는 깜짝 놀라고 “네가 웬일이냐?”며 환하게 반기신다. 4시에 유무상통 성당에서 미사를 하고 이모랑 함께 식사도 하고는 엄마랑 이모를 현관 앞 벤치에 앉혀놓고서 이 딸은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이모도 “언니, 어디서 저런 물건이 나왔수?” 라며 좋아하시고 “성서방, 저런 이쁜 여잔 걸 어케 알았수?”라며 조카사위를 놀리신다.
방에 돌아와 오랜만에 입을 연 엄마의 흘러간 얘기는, 고장 난 레코드판이 어디에 걸려 못 넘어가듯 같은 자리에서 돌고 또 돈다. “그래, 뇌라는 컴퓨터도 97년을 썼으니 약간 망가졌겠지?” 누가 포맷을 했는지 몇 가지를 빼고는 다 백지 상태다. “언젠가 그 백지 위에 하느님이 찬란한 그림을 가득 채우시겠지” 하며 잠든 얼굴을 바라본다.
‘엄마 앞에서 짝짝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