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선생에 대한 국가폭력 사건이 일어난 지 500일이 지났다. 백남기 선생을 추모하며 타올랐던 촛불은 광화문으로 옮겨붙어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 심판을 이뤄냈지만, 불씨를 일으켰던 국가폭력 사건은 500일 동안 제자리다.
백남기 선생의 유가족과 백남기투쟁본부, 시민사회단체 등은 27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대병원에서 켜졌던 촛불은 광화문광장으로 옮겨붙어 박근혜를 탄핵했지만,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사건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며 울분을 터트렸다.
500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백남기 농민을 쓰러트린 자 중에 그 누구도 사과하거나 책임을 지거나 처벌되지 않았다. 박근혜가 파면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운이 움트고 있지만, 아직도 그 일당들이 만들어놓은 적폐들은 하나도 청산이 되지 않고 있다.
정현찬 가톨릭농민회장은 “317일 동안 병원에서 사투를 벌였고, 시신 탈취를 막으려고 시민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박근혜를 용서치 않았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 사건을 수사하지 않고 있다”며 검찰이 하루빨리 물대포로 국민을 살해한 경찰을 처벌 해 줄 것을 촉구했다.
“검찰, 수사의지 없다”
백남기 선생 국가폭력 사건의 소송을 맡은 민변 송아람 변호사는 “면담 요청을 해 대화를 할 때마다, 검찰은 형식적으로 ‘수사는 진행하고 있다. 기다려봐라’한다. 하지만 변호인단이 질문한 내용에는 답변을 못 한다”며 검찰이 수사 의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경찰과 정부도 검찰과 다르지 않다. 재판부가 사건 원인에 중요한 단서가 될 문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는데도 전혀 협조하지 않는다. 진상규명을 소극적으로 은폐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송 변호사는 “사건을 진행하면서 피해자인 백남기 어르신을 국가가 적으로 돌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밝히면서도, “하지만 박근혜가 내려가고 세월호가 올라오듯이 언젠가는 백남기 어르신 사건의 진상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천 없는 믿음, 세상 더 나쁘게 만든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박순희 상임대표는 백남기 선생에 대한 국가폭력 사건이 신앙인들에게 전하는 의미를 설명하며, 그리스도인들이 감춰진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순희 대표는 “백남기 형제는 이 시대 신앙인들에게 박근혜 정권의 폭력적인 실체뿐 아니라, 농민·노동자들의 문제가 민중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라며 “인간이 봤을 때는 희생양이지만, 하느님이 보셨을 때는 이 시대를 구원하기 위한 어린양”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노동자와 농민이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이들이 없으면 하느님의 창조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라며 “창조사업 완성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에 저항해야 한다. 백남기 형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바로 이 점을 깨닫게 해준 예언자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일 뿐 아니라,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믿음”이라며, 백남기 선생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는 노력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복음화 활동이라고 말했다.
착취당하고 죽어가는 이웃을 옆에 두고도 평화롭게 묵주기도와 미사를 드리면 뭐하나. 닫힌 교회에 앉아 천국과 구원을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천국과 지옥은 현실에서 나타난다. 교회는 말로만 떠드는 사회복음화 보다는 신자들이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바를 제시해야 한다. 십자가를 늘리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세상 현장에 나와야 한다.
박 대표는 “교회는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그분의 수난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공감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며 “그분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사순시기 동안 성당 안에서 묵주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현장에 나와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시대적 문제 해결에 동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폭력 사건을 막기 위해서는 경찰의 공권력 남용 근거인 현행 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과 경찰관직무집행법(경직법)이 개정돼야 한다”라며 이날부터 입법청원 운동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국가폭력에 아버지를 잃은 백도라지씨가 가족을 대표해 마지막 발언을 했다. 그는 “벌써 500일이라는 것도 기가 막히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는 것에 더 기가 막힌다”라며 “박근혜가 탄핵되고 세월호도 올라왔다. 강신명과 국가폭력 책임자들을 처벌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고 말했다.
또한 “사망진단서만 조작한 줄 알았더니, 국정농단의 한 축이기도 했던 서울대병원도 이에 응당한 처벌이 내려지길 기다린다”며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검찰의 신속한 수사를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기자회견 후 백도라지 씨는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한다. 1인 시위는 이날 백도라지 씨를 시작으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매일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한 달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