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9일, 맑음
보스코는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펠라기우스 논쟁 첫 권에 해제를 쓰는데 참고할 책이란다. 성신교정 도서관 검색에 들어가 보니 저·역자 ‘성염’의 이름으로 된 책 130여 권 나오고 그가 쓴 글 제목까지 하면 또 150여 편 다운되는 것으로 그의 그늘에서 평생 내가 잘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외출을 할라치면 그는 무슨 옷을 입을지, 무슨 신을 신을지, 그리고 나 없는 점심엔 무엇을 먹을지 실생활에 관한 한 한참 난감한 사람이기도 하다.
오늘이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 1276차 날이다. 국염 씨와 상옥 씨를 만나기로 해서 12시에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으로 나갔다. 한국염 목사가 ‘정대협’ 대표로 사회를 보았다.
벌써 25년(1990년 11월 16일에 발족했다) 가까이 수요일마다 시위를 하며 인간의 보편진리를 지향하는 모든 종교(가톨릭, 개신교, 불교, 원불교)가 차례대로 이 집회를 진행하는데, 오늘은 불교 차례여서 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에서 맡아 한다. 합천 해인사의 혜찬 스님이 사회를 보았고 ‘희생자 위로 및 올바른 해결을 위해 실천의원’ 세진 스님이 시작을 알리는 법고(북)를 쳤다. 북소리가 힘 있고 그 간절함이 모두의 가슴을 두드려 마음 문을 여는 설득력을 지녔다. 합천 어느 고등학교에서 30여 명의 남학생들이 왔고 ‘영원한 도움회’ 수녀님들, ‘성남 생명의 전화’ 연수생, ‘평화나비’ 등 많은 단체가 끈기 있게 참석했다.
‘세월호 집회’에서 늘 들어왔고 2008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에서 인용하여 유명해진 성경구절(요한복음 1장 5절)을 윤민석이 작사·작곡하여 유명해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문화활동가 류금신이 힘차고 신나게 불렀다. 정말 우리의 은근과 끈기, 평화를 향한 목마름이 저 파렴치한 매국노 집단의 광기를 끊어낼 것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오늘 그 자리에 참석하신 두 분 위안부 할머니는 “우리는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란다”라시며 2015년 위안부 합의는 ‘굴욕적’이고 ‘반인권적’이고 ‘반역사적’이었다고 일갈하셨다. 그분들은 사죄가 선행된 배상을 받으면 그 돈은 전 세계의 상처입고, 파괴된 평화로 인해 병든 여성들의 인권의 해방을 위해 쓰겠다고 하셨다. ‘이젠 그만 잊고 사랑하자’는 사람들 말이 일부 맞기도 하다. 그렇다. 용서하고 사랑하자! 그러나 그에 앞서 진실과 정의로움에서 우러난 사죄의 바탕 위에서만 용서와 사랑이 가능하다.
점심식사 후 성산동에 있는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에 “김복동 길원옥은 평화다”라는 제목의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많은 소녀상을 조각한 김서경, 김운성 조각가 부부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평화의 길을 걷던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궈주고 그 길 주변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던 두 할머니,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과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들에게 당신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고 있을지… 우리 몸은 벌써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다고,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에게 손을 내민다고, 전쟁 없는 세상, 전시 성폭력 없는 세상을 향해 날개 짓을 시작한 두 분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많은 동지들과 함께한 감격스러운 하루였다. ‘이주여성인권센터’를 창립하여 운영하다 퇴임하고 곧바로 ‘정대협’에 몸을 던진 내 친구 한국염 목사가 참 고맙고 참 자랑스럽다. 나 역시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이런 활동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들어 긴 세월 보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