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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5 :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
  • 김근수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7-04-04 11:39:33
  • 수정 2017-04-04 11:4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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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50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습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릅니다. 51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압니까? 아닙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습니다. 52 한 가정에 다섯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53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반대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반대하여 갈라질 것입니다.” 


54 예수께서는 군중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55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56 이 위선자들아, 여러분은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합니까?”


57 “여러분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까? 58 당신을 고소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쓰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당신을 재판관에게 끌고 갈 것이며 재판관은 당신을 형리에게 넘겨주고 형리는 당신을 감옥에 가둘 것입니다. 59 잘 들으시오. 당신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루카 12,49-59)




예수의 지상 삶과 재림 사이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계속 이야기되고 있다. 날씨와 경제에는 관심이 많고 잘 알지만, 역사와 현실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예수가 비판하고 경고하는 이야기다. 루카는 성서 독자들이 예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어서 예수에 대한 태도를 취하도록 재촉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는 예수 어법의 특징이다(마르코 2,17-; 마태오 5,17; 루카 19,10). 49절 왔다는 말은 두 가지를 포함한다. 하느님이 예수를 보내셨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다. 오실 분(루카 7,19-20)은 메시아를 가리킨다. 불은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 하느님이 아직 불 지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불이 처벌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창세기 19,24), 엘리아가 아하사왕의 신하들에게 내린 불(열왕기하1,10-140), 예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리려던 불(루카 9,54)이 떠오른다. 


그러나 49절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Wolter, 468-469). 1. 예수 죽음? 예수는 50절에서 비로소 죽음 이야기를 꺼냈고 불은 예수 죽음에 앞서 생기는 일이다. 그러니 불을 예수 죽음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2. 인간 갈등? 그렇게 생각하기 곤란하다. 52절부터 불의 작용이 아니라 불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종말 심판? 루카 3,12에 그런 언급은 있었다. 


49절에서 미래 사건이 아니라 지상 삶을 가리키기 때문에, 불을 세상 끝 날의 심판으로 여길 수는 없다. 불은 성령을 가리키는가? 성령 오심과 그 후 그리스도 선포를 전망하는 발언 아닌가? 그러나 본문에서 불은 파괴하는 의미를 띄고 있기에 성령을 나타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해설은 아무 것도 없지만, 불은 성령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반대 의견이 가장 적다. 


50절 세례(baptisma)가 예수 운명을 가리키는 비유로 4복음에서 유일하게 등장했다(마르코 10,38- 참조). baptisma 단어는 당시 아주 드물게 쓰였다. 그리스 지방에서는 쓰이지 않았고, 공동성서(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에서, 그리스 지역에 사는 유다인들 사이에서 사용되지 않았다(Bovon, III/2, 352). 50절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릅니다’라는 표현을 보고 놀라거나 의아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왜 예수의 약한 모습을 성서는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낼까? 


예수도 우리처럼 괴로워했다. 예수도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계획에 자신을 맡기고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로메로 대주교도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나는 로메로 대주교를 통해 예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성서 저자들도 예수의 고뇌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예수가 약하기에 예수의 신성을 의심한 게 아니라, 예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에서 신성의 드러남을 본 것이다. 예수는 신성을 지녔기에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보다 더 인간적이기에 인간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우리와 다르기도 하다. 예수처럼 인간성을 완벽하게 드러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촛불 집회 행진에서 횃불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때 떠오른 성서 구절이 바로 49절 말씀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한국 사회와 역사의 적폐를 청산하는 불 아닌가. 친일파와 친미파를 처단하는 불 아닌가. 왜 한국 역사에는 아직도 그 불이 타오르지 않을까. 지금 그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하지 않는가. 한국 천주교 안에 오래 쌓여온 적폐도 말끔히 청산되면 좋겠다. 


▲ 2016년 12월, 6차 촛불집회에서 불타오른 횃불 (사진출처=한겨레)


50절에서 불이 아직 타오르지 않는 이유가 드러났다. 루카는 마르코 10,38 이하를 참고한 것 같다. 세례라는 단어는 로마서 6,4에서 처음 등장했다. 51-53절에서 예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불이 일으킬 결과가 소개되고 있다. 51절 세상은 잘못된 세상을 가리킨다. 잘못된 세상은 분열시키고 뒤집고 고쳐야 한다. 잘못된 세상을 좋은 세상이라고 거짓말 할 수는 없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예언자가 아니다. 52-53절에서 가정에서 생긴 분열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분열은 인간 사회의 기초이자 출발인 가정에서부터 생긴다. 교회가 가정에서 출발했다는 점도 기억하자. 루카는 미가서 7,6을 참고했다. 루카는 5인 가정을 예로 들어 가족 내 세대 갈등과 성별 갈등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시어머니 역할을 겸한 5인 가정이다. 유다교 문헌에 어머니의 모습은 드물게 언급되었다. 예수는 세대 갈등과 성별 갈등을 모르지 않았다. 가족 분열의 아픔도 겪은 예수다. 스스로 가족을 떠났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딸, 아들과 엄마 사이 갈등을 예수는 아직 모르는가 보다. 


51절에서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했다. 아니, 대체 무슨 말인가? 예수 오심은 평화를 주지 않나?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하느님의 사명을 받지 않은 거짓 예언자들은 멸망을 선포해야 마땅할 때에도 평화를 약속했다(예레미야 28,8-9).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종교인, 언제나 희망을 말하는 신학자는 거짓 예언자일 가능성이 크다. 예언자는 외교관이 아니라 신학자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종교인도 예언자도 신학자도 아니다. 


평화가 아니라 분열(diamerismos)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 선언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예수가 가져온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의 평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가정 내에서 사회에서 박근혜 탄핵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박근혜 탄핵을 찬성하는 가톨릭 신자들과 반대하는 신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박근혜 탄핵을 찬성하는 신부, 수녀들과 반대하는 신부, 수녀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이 선고됐던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치는 친박집회에 등장한 십자가 모형 ⓒ 최진


분열이 잘못된 게 아니라 진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쁜 것이다. 분열해야 마땅할 때에는 분열해야 한다. 갈등해야 마땅할 때에는 갈등해야 옳다. 예수는 분열과 갈등을 겪은 정도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몸소 일으키고 부추겼다. 가짜 평화 NO! 의로운 분열 YES!


54-55절에서 루카가 이스라엘 지방의 날씨 사정을 잘 모르고 있음이 탄로 났다. 공동성서에서 동쪽에서 부는 바람이 뜨거운 사막 바람이다(창세기 41,6; 탈츨기 10,13, 에제키엘 17,10).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는 남쪽에서 부는 바람이 더운 바람이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하늘을 보고 날씨를 살피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어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날씨를 읽는 것은 경제와 생존에 필요했다. 당시 사람들은 서쪽을 어둠, 악마, 죽음이 있는 곳으로 생각했다. 세례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악마를 멀리 하겠다고 맹세할 때 서쪽을 등지고 동쪽 방향으로 걸어 성당에 입장했다(Bovon, III/2, 357).


그렇다고 그 사실을 근거로 루카복음의 집필 장소를 추정하기는 조금 성급하다. 어쨌든 이 부분의 주제는 날씨가 아니다. 예수가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우리가 아는 게 중요하다. 56절 시대(kairos)의 뜻이라는 표현은 마태오 16,3에도 나온다. 예수 말씀과 행동이 시대라는 말이다. 


날씨는 알아보지만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자연 현상에는 관심 있지만 역사와 현실에 무관심한 사람을 예수는 위선자라고 불렀다. 루카는 위선자라는 단어를 루카 6,42; 13,15에도 쓴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연 너머의 초자연으로 눈을 돌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날씨와 비처럼 평범한 자연을 아는 것처럼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의 말과 행동이 곧 현실이요 역사요 하느님의 시간이라는 말이다. 날씨와 비를 아는 것처럼 하느님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을 알라는 말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자연을 알지만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은 위선자다. 제주도에 와서 자연은 아름답지만 역사는 슬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위선자다. 현실에 무관심한 사람은 위선자다. 이스라엘 역사는 잘 알지만 한민족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위선자다. 역사와 현실에 무관심한 사람은 위선자다. 


종교와 종교인은 역사와 현실에 어느 정도 무관심해야 옳다고 주장하거나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예수와 거리가 한참 멀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종교를 모른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자연종교가 아니라 역사종교다.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잘못된 신앙의 제1 특징이다. 


58절에서 예수는 성서 독자들을 가정법 상황으로 초대한다. 독자들은 고소당해 법정으로 끌려가 재판받는 신세에 놓여진다. 민사 소송인지 형사 소송인지, 당시 돈으로 풀려나는 보석금 제도가 있었는지 궁금하겠다. 하느님께 죄를 지은 사람은 성서는 돈 빚진 사람으로 자주 비유하고 있다(마태오 6,12-; 18,23-35). 


성서도 자본주의 논리에 빠졌다는 말일까? 그것이 본문 주제는 물론 아니다.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쓰라는 58절이 주제다. 힘쓰시오ergasia didomi는 루카복음에서 여기에만 보인다. 감옥에 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늦기 전에, 어서 하라는 말이다. 때kairos를 놓치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의 등장과 말씀과 행동에 대해 루카는 독자들의 고뇌와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태도를 어서 정하라! 시간이 없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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