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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64 : 충실히 준비하라
  • 김근수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7-03-28 11:22:24
  • 수정 2017-03-28 1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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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여러분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으시오. 36 마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시오. 37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합니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입니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39 생각해 보시오. 도둑이 언제 올지 집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40 사람의 아들도 여러분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으시오”  

41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주님, 지금 이 비유는 저희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까? 저 사람들도 모두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고 묻자 42 주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습니까? 43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습니까? 그 종은 행복합니다. 44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입니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46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 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입니다. 47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 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 맞을 것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루카 12,35-48)




재산에 대한 욕심을 경고하는 주제로 앞에서 여러 이야기가 있었다. 루카는 이제 종, 집 주인, 재산 관리자의 비유를 들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충실히 기다리자고 권고한다. 본문은 35-40절과 42-46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에서 종과 청취자도 2인칭 복수로 말해지고 있지만, 둘째 부분에서 종은 언제나 단수로 언급되고 있다. 41절에서 베드로의 끼어들기 질문이 있었고 46-48은 본문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39-40은 마태오 24,43-44에서, 42-46은 마태오 24,45-51에서 볼 수 있다. 루카와 마태오가 예수 어록을 참조했다는 뜻이다. 루카가 마르코 13,33-36을 참고한 것 같지는 않다(Wolter,460). 35-38절이 예수 어록에 담겨 있는지 성서학자들 사이에 논란되고 있다. 39절은 도마복음 21,5에 보인다. 주인, 종, 오다,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깨어 있어라, 충실히 봉사하라가 두 핵심 단어다. 


35절 허리에 띠를 매는 것(마카베오상, 58)은 일할 준비를 갖추는 자세다. 탈출기 12,11의 탈출 부분을 참조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신발 끈을 조여 맨다는 말이 우리 한국인에게 익숙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시간kairos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갈라디아 4,4). 파스카 축제나 큰 축제를 유다인들은 밤에(탈출기 12,42) 지냈다. 등불은 밤에 준비한다는 표현이다(마태오 25,11-). 밤에도 일할 자세로 있어야 하는 서양 사회를 루카는 생각한 것 같다. 종은 밤에도 일해야 한다는 말인가? 지나치지 않은가? 당시 종들은 정해진 노동시간이 없었다(Bovon, III/2, 327). 36절 혼인 잔치gamos는 단순한 축제(루카 14,8)를 가리킬 수도 있다. 허리에 띠, 켜놓은 등불, 문 열어준 준비는 모두 깨어gregorein 기다림을 상징하는 표현이다(마태 25,13; 사도행전 22,20; 요한묵시록 16,15).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하다. 종이 주인에게 하던 대접을 주인에게 받는다는 것이다(루카 22,27; 요한 13,1-17). 루카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식사 시중을 든다는 주제를 요한복음과 공유하고 있다. 교황이 노숙인에게 식사 시중을 드는 장면은 참으로 멋지다. 밤을 3등분(18-22, 22-3, 2-6) 또는 4등분( 18-21, 21-0, 0-3, 3-6)하는 관습(마르코 6,48; 13,35; 사도행전 12,4)이 있었다. 본문에서는 3등분을 전제한 것 같다.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이란 표현은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며 예상보다 늦어질지 모른다(마르코 13,15-)는 뜻이다. 깨어 기다리라는 가르침이다(테살로니카전서 5,2; 베드로후서 3,10; 요한묵시록 3,3). 39절 도둑은 그리스도 재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였다(테살로니카전서 5,2; 베드로후서 3,10; 요한묵시록 3,3). 



39절을 자세히 보면 놀라운 발견이 하나 생긴다. 도둑이 언제 올지를 종뿐 아니라 집주인도 모른다는 말이다. 예수 재림을 맞이할 때 주인과 종의 사회적 차별은 무의미해진다는 뜻이다(Wolter, 463). 유다교 율법은 강도보다 도둑을 더 엄하게 다루고 있다(레위기 5,20-26; 판관기 21,23; 이사야 3,14-15). 왜 그럴까. 강도가 도둑보다 더 악하지 않은가? 도둑은 동족 유다인이 하는 짓이요 강도는 주로 외국인이 저지르는 짓이었다. 도둑은 밤에, 강도는 낮에 흔히 일어났다. 율법은 동족에 의한 동족의 수탈을 이방인에 의한 강도질보다 더 심하게 처벌한 것이다(Bovon, III/2, 331). 강도보다 부패의 폐해를 더 심각하게 여긴 것이다. 유다인은 동족 유다인의 재산을 훔쳐서는 안 된다. 유다인이 생각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박근혜의 부패를 보면 강도보다 도둑질을 더 나쁘게 여긴 율법의 깊은 뜻이 이해된다. 


40절 ‘항상 준비하고 있으시오’는 신약성서에서 여기에만 있고 마태오 24,44에 상응 구절은 있다. 구약성서(공동성서)에는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이스라엘이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릴 때(탈출기 19,15), 모세가 하느님을 뵈올 때(탈출기 34,2), 그리고 민수기 16,16에도 있다. 예수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때 넘어지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마르코 8,38; 13,26-; 마태오 25,31).


41절에서 베드로는 본문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지 직무를 맡은 사람을 향하는지 묻고 있다. 42절 예수의 답변에서 35-40절 주인과 종 이야기가 주인과 관리인으로 바뀌고 있다. 관리인Terapeia은 창세기 45,16, 39,4, 신명기 1,13에 보인다. 루카는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마르코 13,37)을 주로 의식하고 있다(고린토전서 4,1). 충성스러운pistis은 관리자에게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이다(고린토전서 4,2). 주인은 충실한 관리자에게 모든 재산 관리를 맡길 것이다(루카 19,17; 고린토전서 3,14). 


45-48절에서 불충실한 종에게 내리는 심판이 경고되어 있다. 47-48절은 마태오에는 없다. 45절에서 예수는 마치 종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심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방식의 서술은 공동성서에서 하느님의 성격에 익숙하다(신명기 9,4; 시편 10,6; 예레미야 5,24). 45절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한 모습은 준비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사무엘하 11,13; 이사야 49,26). 


46절 동강내고dikotomein는 하느님 심판을 상징하는 두려운 표현이다. 사람 몸을 둘로 나누어 죽인다(탈출기 29,17; 예레미야 34,18)는 뜻이다. 논리학에서 2분법이란 단어가 여기서 비롯된다. 페르샤 문명에서 도입된 처벌 같다(Bovon, III/2, 337). 꺼지지 않는 불(루카 3,17)도 이미 등장했다. 46절 불충한 자들hoi apistoi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초대교회는 이해했던 것 같다(고린토전서 6,6; 티모테오전서 5,8; 디도서 1,15).


48에서 주인의 뜻을 몰랐다면 매 맞을 만한 짓을 하였어도 덜 맞을 것이라고 하였다. 모르고 범한 죄나 부주의로 저지른 죄보다 알고도 행한 범죄를 유다인들은 더 엄하게 처벌했다(민수기 15,27-31). 알고도 행한 범죄, 즉 부정부패는 우리 사회에서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 재벌과 정치인의 부패는 물론이지만 종교인의 부패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사진출처=YTN뉴스 갈무리)


예수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주인과 종이라는 자기 시대 상황을 비유 소재로 삼았을 뿐이다. 주인과 종으로 이루어진 당시 사회 체제나 전제주의를 예수가 지지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교회를 창설하지 않았던 예수가 교회 직무자들에게 어떤 지침을 내릴 리 없다. 본문은 예수가 진짜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뜻이다(Kremer, 141). 초대교회에 닥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마치 예수가 한 말처럼 성서 저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다. 초대교회에서 예수 재림이 늦어지는 데 초조한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주인의 뜻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엉망으로 교회를 관리하는 직무자는 가혹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된다. 본문은 오늘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마땅히 적용된다.  


충실한 종이 되어라, 교회 관리를 제발 제대로 하라는 예수의 간곡한 호소가 한국 천주교에 들리는 것 같다. 대구, 인천, 서울 등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한국 가톨릭의 비리 소식을 듣고 예수는 얼마나 슬프실까. 악한 관리자들이 교회에 참 많다. 한국 가톨릭이 전체적으로 활력을 잃고 뚜렷한 추락세에 접어들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등장 이후로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는 다른 나라 가톨릭과 정반대 모습이다. 대체 왜 그럴까. 


지금 한국 가톨릭의 위기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국가 권력의 박해 때문이 아니라 한국 가톨릭이 스스로 자멸하고 있다. 주로 돈 때문이다. 2. 한국 가톨릭이 일으키고 있는 말썽 대부분은 평신도가 아니라 주교와 사제들이 일으켰다. 3. 한국 가톨릭의 평신도 통제 능력은 교묘하게 강화되고 있지만, 성직자들의 자정 능력은 엉망인 상태다. 주교가 연관된 문제에는 자정 능력이 거의 붕괴되었다. 4. 가톨릭 언론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 언론은 주교들의 홍보지 역할에 머무를 뿐이고, 교회 비판을 외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5. 한국 가톨릭을 감시하고 처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주한 교황대사는 거의 최순실 수준이다. 6. 교회 적폐를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주교들이나 사제들이나 평신도 단체들에서 거의 없다. 7. 대부분 주교들은 신앙의 스승이라기보다 교회 조직과 자금 관리자 정도에 불과하다. 추기경 두 사람은 아예 존재 의미가 없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교회 비리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사제들의 내부 고발이나 양심선언을 기대하기는 아주 어렵다. 평신도 운동가 중 주교와 사제 이름을 정확히 언급하며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촛불 집회에 나오는 주교는 한 사람도 없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조중동과 종편방송을 통해 보는 신부와 수녀들이 적지 않다. TV를 통해 구경하고 시국을 한탄하는 사제는 많지만 광장에 나와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악의 세력과 싸우는 사제는 적다. 발코니에서 세상 구경을 하려는 모양이다. 골프장 출입 등 사제들의 세속화 현상은 더 늘고 있다. 돈 맛을 알고 겉멋을 알아버린 사제들이 많다. 국민들과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가톨릭 성직자들 숫자가 줄어들었다. 


가톨릭 신자수가 100만 넘게 줄어들었다. 통계조사 기법에 대한 의문으로 신자 수 감소의 이유를 둘러대기는 곤란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본당신부를 피해 다른 성당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순례자형 신자가 갈수록 늘고 있다. 쉬는 신자가 증가하고 있다. 성당마다 일요일에 빈자리가 눈에 띄게 보인다. 주일미사에 나오는 신자 비율이 30% 이하에 머무르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한 실망과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있다. 주교와 신부들에 대한 사람들의 언어와 눈초리가 예전과 달리 심상치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존경하는 사람도 많지만, 한국 가톨릭에 실망한 사람도 많다. 


한국 가톨릭 평신도들의 자존심이 크게 줄었다. 예전에는 “가톨릭은 그래도 다르다”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가톨릭도 다를 바 없어“라는 한숨이 대부분이다. ‘개톨릭’이란 단어까지 나왔다. 신자들의 추락한 자존감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과거와 현재의 일부 모범적인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인용하는 것으로 한국 가톨릭의 위기를 무마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정직한 방법이 아니다. 


교회 안의 인적, 구조적 적폐를 모조리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천주교에 현재와 미래는 없다. 한국 가톨릭이 겨울잠에서 어서 깨어나야 한다. 민족의 앞길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선도할 힘이 지금 한국 가톨릭에는 불행하게도 없다. ‘이러려고 내가 순교했는가’ 하는 한국 순교자들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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