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2일 토요일, 맑음
작년 ‘삼각산 시화제’(진달래꽃제)를 올리던 날 ‘우리 시’ 행사에 처음으로 홍해리 시인이 빠졌다. 수십 년간 그 행사를 주관하고 사회하는 분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일제히 ‘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직감을 했다. 시인이 아내의 치매를 그려내며 우리 모두가 이미 겪고 있거나 겪을 치매를 두고 ‘치매행(致梅幸)’이란 시와 시집으로 우리의 공감을 이끌어 가는 중이다.
이번 달 「우리 詩」를 펴보니 그 사연이 거기 시로 그려져 있다. 두 아들과 딸 사위 도우미와 케어 센터 직원과 경찰까지 나서서 찾은 지 여덟 시간. 집에서 5~6km 떨어진, ‘6번 버스 종점’에서 천하태평하게 앉아 있다 경찰차에 실려 집에 온 아내. 시인의 속은 ‘까맣게 익은 해바라기 씨앗’처럼 새까맣게 탔고, 엄마가 반가워 끌어안고 우는 딸을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바라보는 아내를 지켜보는 시인을 생각하며 가슴은 아린데 정작 해드릴 게 없다.
배나무 밑에 우엉이 무성하게 자라올라 몇 뿌리 캐서 졸임을 했다
저런 일이 내게는 안 일어 난 것에 안도하는 유치한 사람도 있고, 동정은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함께 해 줄 일이 정말 적음을 탄식하는 마음도 있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와도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정성스럽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다정불심(多情佛心)’ 혹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만하다.
오전에 어느 지인이 전화를 했다. 자기 친척이 먼 나라에서 왔는데 화가여서 그림 그릴 곳을 찾는단다. 피정도 한 일주일간 하고 싶다며 마땅한 곳을 찾아달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아 산청 성심원 원장신부님께 부탁을 드리니 여느 때처럼, 기꺼이 오시란다. 프란치스칸들의 선선한 손님 접대다.
그런데 그 지인의 반응이 놀랍다. 성심원이라면 아픈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그 화가는 고통의 현장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면 힘들어 할 사람이란다. 다른 곳을 찾아달라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고(苦)에 관한 깊은 체득이야말로 예술과 문학의 최고의 경지로 우리 혼을 이끌 텐데…
실상사는 ‘난개발’을 안 해서 소박한 절로 간직되어 좋다
성심원에 갈 때마다, 그곳 노인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몽당손을 볼 적마다, 저분들이 한 평생 받아온 고통의 의미를 헤아리며 머리 숙여지고, 그분들과 함께 살면서 희생적인 봉사를 바치는 직원들과 수도자들의 모습만으로도 깊은 감명을 받는데…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하느님은 고통과 함께 충만한 은혜를 1+1 상품으로 묶어서 파신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것은 먼 훗날, 아마도 이승의 문지방을 넘어가면서이리라.
실상사에서 첫 번째 ‘산사 속 인문학 산책’이 열리고 강신주님이 강의를 한다기에 우리 독서회에 아우들 중 ‘강신주 광팬’들이 생각났다. 강신주님의 강의를 들으러 오후에 서울까지 버스로 올라가서 10시까지 강의를 듣고, 심야버스를 타고 새벽 3시에 함양으로 돌아오곤 한단다. 랩 음악에 미친 아들이 옆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랩을 흥얼거리고, 뽕짝을 열심히 부르는 고모 옆에서는 뽕짝을 배우고, 유치원 다니는 손주와는 만화영화 주제곡을 부르게 마련. 나마저 서울까지 오르내릴 열정은 없어도 친구 따라 옆동네 실상사까지는 가보기로 했다.
오늘 강신주 박사의 강의제목도, 우연인지 “고통에 빠진 타자를 떠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자비는 사랑으로, 자비의 자리는 이타적인 것으로 집착을 초월케 만드는 행위란다. 사랑은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고, 타인을 주인처럼 모시게 한단다. 불자들이 열반에 이르렀더라도 그 경지에 마냥 머무르지 못하는 까닭은 내 마음이 아프니까 타인의 아픔을 끌어안는 게 더 행복하고 맘 편하므로 자비행을 하게 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므로. 단 자신과 피붙이만 끌어안는 ‘사사로운 사랑’은, 거기에만 머무는 인간을 파멸시킨다! (사랑이 사람을 파멸시키다니!) 팔을 널따랗게 펴서 많은 사람을 끌어안는 ‘사회적 사랑’만이 인간과 사회를 구원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 가르침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