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30일 화요일, 맑음
보스코의 옷을 다리미질 하고 넥타이를 찾아놓고 구두는 깨끗이 닦아 놓았다. 교황청 갔다 온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청와대에 들어간다는 남편을 말끔히 단장시켜 아주 비싼 차(지하철)로 모셨다. 내가 자기를 태우고 청와대를 같이 가리라 생각하고서 내 이름과 차량번호도 등록해 놓았다지만, 국사(國事)는 남편 하나만 바쁘면 되고 나는 가사(家事)로 할 일이 따로 있다.
골목도 깨끗이 쓸어야 하고, 마당 한 켠의 둥굴레를 캐내고, 그 자리에 실파도 심고, 잔디에 뿌리가 남은 질경이나 민들레도 캐내고… 파는 잎을 자르고 네 단을 네 줄에 펴 심었다. 보스코에게, 우리가 서울로 귀향하면 마당 잔디밭을 갈아엎어 상추, 고추, 오이, 가지를 심겠다고 했는데, 그의 문화충격을 줄이기 위한 예행연습이기도 하다.
골목안 생명
오늘이야 막 심은 뒤라 볼품없지만 뿌리를 내리고 새 움이 나오면 꽃만큼은 아니어도 잔디에는 견줄만 할 꺼다. 게다가 먹거리도 되지 않나? 우리 골목의 길이는 25m 정도다. 골목을 쓸다보니 옆 건물의 지반이 내려간 자리에 흙이 메워지고 거기에 날아온 엉겅퀴와 씀바귀가 여린 대를 올리고 힘없이 꽃을 피웠다. 버려진 땅에도 저리 질긴 목숨을, 기약할 수도 없는 내일을 위해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산다는 게 성스럽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동네 아짐들이 하릴없이 심심한 듯 멍하니 앉아 있다. “어이, 아가씨들. 내가 쏠께 꽁보리밥집에 갑시다” 동시에 아줌마들 얼굴이 환해진다. 12시에 가기로 하고 박총각 점심을 챙겨줬다. 삼겹살에 쌈, 된장찌개, 오이지무침, 콩나물… 오랫동안 ‘혼밥’을 먹어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부자연스러워한다.
어제 보스코가 밥을 먹고 나가라는데 자기는 먹는 게 중요치 않다고 대꾸했다기에 내가 연설을 좀 했다. ‘영혼’은 영혼의 양식이 필요하고 이 연약한 몸을 위해서도 육신의 양식은 중요하다. 예수가 왜 ‘최후 만찬’ 즉 죽기 전에 먹는 일을 했을까? 그건 삶이 즉 사람이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고, 힘들고 가난한 이는 바로 몸으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돈 있으면 빵 사먹어라”라고 안 하시고 너희가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신 말씀만 봐도 진리는 현실과 괴리가 없다는 말이다 등등등.
골목안 풍경
12시 동네 아줌마들을 싣고 4·19탑 앞에 있들 꽁보리밥집 ‘신정’엘 갔다. 꽁보리밥에 파전까지 먹고서 오는 길에 ‘여러분이 홍준표를 찍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재인이 이겼으니 내가 쐈다’고 하니 모두들 ‘아니, 난 문재인 찍었는데’라고 이구동성. 왜 그 사람을 찍었냐니까 ‘그 사람 빼고는 찍을 사람이 없어서’란다. ‘다들 밥값 하셨다. 고맙다’ 했더니 ‘우리 기분인데 도선사나 올라가 보자’ 한다. 다들 다리가 안 좋아 법당 앞까지 가서 그늘에 앉아 놀다 내려왔다.
작은 행복에 감격하며 내려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지금은 ‘할렐루야 기도원’이 인수한 ‘고향산천’이란 요정에서 십수년전 상수엄마는 주방에서 밥만 7년을 했다고, 옆집 아짐은 그 옆에 있는 선운각 요리집에서 6년을 설거지만 했단다! 사실은 도선사보다 자기들이 일하던 곳을 둘러보고 싶었나 보다. ‘여자로서 우린 참 폭폭한 인생을 살았다’며 ‘빵기엄마처럼 팔자 편한 여자는 한턱내도 된다’라는 아짐들의 결론. 어디 한턱뿐이랴. 다음에도 시간 있을 때 가끔 위문공연을 해 드려야겠다.
도선사 풍경
그분들은 이웃에 살며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고 간간이 내게 김치며 된장 등을 나눠주고, 특식으로 끓이는 감자탕 곰국은 식구대로 먹으라고 냄비 가득 퍼준다. 떡이며 수제비 부침개… 무엇이든 담 너머로 나눠주는, 말하자면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다.
보스코는 11시에 김희중 대주교님과 청와대에 들어가 40여 분간 대담을 하고, 두 손주를 핑계로 두 아들에게 선물할 사인을 받아오고, 대주교님이 내는 점심을 대접받고, 큰 차(전철과 버스)로 돌아왔다. 늘그막 모처럼의 공사(公事)를 오늘로 마쳤으니 내일은 휴천재로! 나이 땜에 시차적응이 힘든지 오자마자 낮잠에 빠진다.
청와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