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8일 일요일, 맑음
폭염주의보를 지나 폭염경보까지 핸폰의 창을 두드리는 날에도 새벽미사를 가는 아침 공기는 청량하다. 한껏 가슴을 펴고 입을 벌려 그 기운을 빨아들이면 하루를 버틸 힘이 몸 안에 가득 찬다. ‘성체성혈대축일’. 장신부님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란 ‘영원을 꿈꾸는 사람’이라 했다. 사람들이 어려서 먹는 음식은 성장하게 하고 나이들어 먹는 음식은 사람을 죽게도 하지만, 신앙인들이 먹는 음식은 영원히 늙지 않고 죽지 않게 하는 음식이란다.
그런데 이 음식을 먹는 사람으로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시던 예수님처럼, ‘타인을 다 내 밥으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모든 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그분처럼 ‘타인의 밥’이 되어야 한단다.
마산주보에서 실린 이제민 신부님 강론에서는, 매일미사와 주일미사를 꼬박꼬박하고 성체를 열심히 영한다 해도 이웃의 행복과 사회적 평화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모령성체(冒領聖體)’가 된다고 경고하신다. 내가 보니 가톨릭 수도자와 성직자가 제일 무서워하는 죄가 ‘죄 있는 채로 성체를 영하는’ 이 모령성체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사회정의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이웃을 향해 무엇을 나누었는가가 우리 구원과 직결된다는 가르침이다.
얼마 전 휴천재를 방문한 성공회 윤신부님은 당신 성당에서 일어난 일을 진솔하게 들려주셨다. 어느 날 교회에서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했단다. “교인들은 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용기 있게 움직이던 저는 그 일에는 침묵했습니다. 저녁에 전화가 왔습니다. ‘왜 신부님은 아무 말도 안하나요?’ 나는 침묵했습니다. 그러자 전화기 넘어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청천벽력이 울렸습니다. ‘야, 이 개새끼야, 교회정의도 말하지 못하는 새끼가 무슨 사회정의야!’” 신부님은 마르틴 루터 킹을 인용하면서 글을 매듭짓는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시민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그래도 촛불시위로 혁명을 이뤄낸 국민이 80% 넘게 문대통령을 지지하고, 대한민국 정치풍향계인 호남인심은 99%가 지지한다니 국민이 ‘소름끼치는 침묵’을 지키는 정치판은 아니다. 단지 국민의당까지 포함해서 야당들의 파렴치하고 뻔뻔한 발목잡기가 우리 같은 여염집 주부들에게까지 소름 끼치게 한다.
여름에 집을 비우려면 정리를 해 놓아야 한다. 오후 내내 식당채 싱크대 물건을 꺼내서 정리하고 합치고 버리고 새로 종이를 깔고… 내가 넣어두고서도 모르거나 잊고 지낸 물건도 많다. 말하자면, 없이도 살 수 있었는데 사 쟁였다는 말이다. 내 친구가 병원에 입원해서 제일 큰 고민이 ‘이대로 죽으면 저 많은 물건을 치우며 사람들이 얼마나 내 욕을 할까?’하는 생각이더란다. 그래서 퇴원 후에 한 첫 번째 일이 ‘쓸데없는 물건 버리기’였단다. 내가 아직도 못 버리는 건, 오래 살 자신이 있어서가아닌, 버릴 용기와 시간이 없어서다. 언젠가 하루 날 잡아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다.
제네바 손주들과 오랜만에 스카이프로 얼굴을 보았다. 교민학교에서 책을 많이 읽었다고 ‘다독상(多讀賞)’을 두 손주가 다 타왔다 해서 칭찬을 해주고 작은놈 시우에게 책 좀 읽어 달랬더니 더듬더듬 읽어 가는데 그것도 마냥 신통하다. 큰놈 시아는 학교에서 시행하는 전국 학습능력평가에서 100개 문제 중 두개를 틀렸다고 하기에, 며느리에게 축하한다면서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니 ‘다 못 맞추어 억울해요’란다. 울 며눌 제네바에 살아도 ‘대~한.민.국.’ 엄마다. 나도 30몇 년 전 이탈리아에서 빵기에게 같은 기대를 했었으니까…
식사 후 어둑한 강변을 걸으며 마을 안방을 떠나 앞산, 뒷산으로 잠자리를 옮긴이들을 기억하면서 로사리오 한 알씩을 바쳤다. 긴 세월이 아니었는데도 많은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 로사리오 두 단으로도 꼽기에 부족하다. 휴천강 물처럼 시간도 흘렀고…
보스코 서재 창밖으로 해마다 찾아오는 두루미가 오늘 자태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