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3일 월요일, 흐리다 비
다시는 전화를 하지 않으려니 했다. 우리의 성향과 정체성을 잘 알고 있고 특히 보스코의 ‘강성좌파’ 이미지를 많은 사람이 알고 있어 그도 모를 리가 없을 게다. 시청 앞 태극기 집회 연단에 올라 ‘박근혜 불쌍하다’며 청와대를 향해 큰절을 하는 모습을 TV 화면으로 봐야 했다. 월남전 참전 용사라더니 전쟁의 참사를 거쳐 마음 한구석이 단단히 상처 입었나보다 했다.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싸운 사람이니 살기 위해 상대 군인을 죽였을 수도 있다(그래도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을 평생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야 한단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저항하지 못하는 비무장의 아녀자를 학살했거나, 네이팜탄이나 화염방사기로 마을과 집을 불태우면서 그 불길 속에서 몸부림치며 함께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한 군인이라면 살아가는 모든 날에 깊은 상처로 남으리라. 그가 그런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는 증거는 그가 우릴 만날 적마다 월남전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인물이 전화를 해와 안부를 묻고 보스코의 바티칸 특사파견을 축하해왔을 때는 ‘전화를 받아야 하나?’ 한참 망설였다. 그래도 정치적 승자로서 우리가 아량을 보여야 할 것 같아 전화는 받았는데 이젠 혹시 찾아온다면 무슨 얘기를 나눠야 할까 걱정이다.
함양읍에서 우리가 사는 문정마을로 오는 버스 안에서 대포마을 영감님이 보스코에게 실토한 얘기가 아직도 내 머리에서 맴돈다. 65년 전 자기 손으로 무죄한 사람들을 죽였다는 죄의식이 저승에 갈 날이 가까워지면서 더 절박해졌던가 보다. 삶과 죽음 앞에 섰을 때 인간의 맨 밑바닥에 남은 참 모습을 보인다면 하느님은 구원과 용서를 베푸실 텐데… (관련글보기)
오늘 ‘자유당’이 홍준표를 당 대표로 선출하였다. 대선 내내, 당권경쟁 내내 ‘빨갱이 타령’ 외에는 할 말이 없었던 ‘막말 홍준표’ 밖에 자기네를 대표할 인물이 없다면 아직 당 지지율 15%를 고수하는 보수집단의 정체가 무척 걱정스럽다.
미루가 아침마다 보내주는 ‘교황님 오늘 소식’에서 아르헨티나의 교황청 산하 청소년재단이 정부에서 14억을 기부받은 일을 두고 교황님이 그 돈을 반환하라는 편지를 하셨단다. 교황님은 사업에도 절제가 필요하다며, 사람을 착취하고 노예처럼 부려 번 돈으로 교회를 후원하려는 사람에게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히신다. “그런 더러운 돈은 필요 없다. 교회사업에도 절제와 가난, 고결함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우리 한국 교회에 하신 말씀 같기도 하다. 요즘 소위 ‘천진암 성지’의 무절제한 개발과 불의에 대해 사회의 비난과 지자체의 벌금부과를 뉴스로 접하면서 받는 느낌: “교회가 먼저 정의롭지 못하면서 성지를 개발한다면 되레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욕보이는 꼴 아닌가?” 예수님마저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하는 짓이 너희가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29-32)라고 호통치신 음성이 들리는 기분이다.
비 내리는 창 밑에서 오후 내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인간이 가졌다는 오만한 자아가 고통과 죽음 앞에 처참하게 부서져 가는 모습을 생각하며 빗줄기에 부서져 스러지는 꽃들을 본다.
저녁에 강변으로 산보를 하는 길에 친구의 병세에 관한 암담한 소식을 듣고 그니를 위해, 또 아내 곁에서 함께 마음이 무너져 내릴 그니 남편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며 그분에게 우리는 무엇인가?” 인생의 끝날까지 질문만 맴돌 뿐 답을 얻지 못할 의문이다. 삶과 죽음은 ‘신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