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9일, 일요일 비
서울 온 길에 함 신부님께 들러 미사를 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말씀을 같이 읽고 자기소개와 말씀 나누기를 하다 보면 각자의 현재 상황과 때론 어려움도 듣게 된다. 그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 나가는가 보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끝이 안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막막하고 어려웠던 강을 어느 새 건너가 있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황천을 건너 모든 번뇌를 내려놓은 이들의 얘기도 어제 일처럼 나온다. 특히 삶과 죽음을 두고는 하느님께서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신다.
점심 후 3시 20분 버스로 내려오는데 밖이 어둑해지며 비가 억세게 내려 앞이 안 보인다. 어둠 속의 빗길은 꼭 저 1997년 시칠리아의 밤을 떠올리게 만든다, 20년이 지났어도. 로마에서 보스코의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시칠리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마을 트로이나에 있는 ‘오아시 공동체’에서 있던 현대라틴어학회에 유럽 백여 명의 학자와 학생들이 현대라틴어로 대화하고 발표와 토론을 하는 4박5일의 일정에 보스코(그의 학위는 ‘고전 및 그리스도교 라틴어문학’)가 참석했는데, 시칠리아를 다시 볼 기회라 싶어 따라 나섰다. 헌데 이탈리아 말이라면 아쉬운 대로 불편이 없었지만 라틴어로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완전히 이방인이었다.
트로이나와 오아시
내가 몸살을 하자 보스코는 나더러 혼자 팔레르모에나 다녀오라는 제안을 했다. 200km 안 되니 두어 시간 가고 두어 시간 오면 아무리 겨울이라도 댓 시간은 팔레르모 관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보스코의 말에 아침을 먹고 떠났다. 트로이나가 워낙 깊은 산골이고 길이 험해 세 시간 넘어 팔레르모에 도착했다. 두오모와 광장을 보고, 점심도 먹고, 젊은 동양여인에게 친절한, 마피아 같이 생긴 아저씨에게 커피도 얻어 마시고, 네 시가 넘어 마지막으로 그래도 그곳에 가면 꼭 찾아보라던 ‘카푸치노 카타콤바’는 봐야 할 것 같아 찾아갔다.
이미 어둑해지는 시각, 욕심스럽게 생긴 수사님이 돈통을 들이밀기에, 주변을 보니 나밖에 없었다. 하여튼 거금을 헌금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로마시대부터 내려온 지하묘지에다 카푸친회 수사님들의 시신을 묻고, 탈육이 되면 그 뼈를 발라 사람형상으로 복원하여 세우고(“사람아, 너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을 일깨우는, 으스스하고 그로테스크한 관습이다), 그러다 보면 일반 시민들도 자기네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라나 해골로 이장하여 그곳에 세워놓고 성묘하는 문화가 1000년 가까이 내려왔다.
팔레르모 ‘카푸친 지하묘소’
내려가는 계단 양옆부터 사람을 미라로 만들어 날개를 단 천사들이 나르고, 구석구석 미라에 신랑 정장을 한 신랑들과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들 무리가 있고 옆에는 들러리 꼬마들이 신랑과 신부들처럼 치장을 하고 웅성거린다. 사제, 수녀, 한다하는 아줌마와 아저씨들… 어찌 보면 우리와 친근한 이웃들이어서 말이라도 걸겠지만 해골이나 미라로 서 있는 외모로는 절대 친해질 수가 없었다.
그 넓은 곳에 나 혼자라서 으스스했지만 입장료가 아까워 꾹 참고 둘러보는데 멀리서 철문 닫는 소리가 쿵! 아차! 하며 여러 층 계단을 뛰어올라갔더니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에드가 엘린 포의 소설 “어셔가의 몰락”처럼 저 세상의 사람들과 이 밤을 함께 해야 하다니! 나는 죽어라 문을 두드렸다. 얼마 후 열쇠 따는 소리와 함께 “끼익” 하고 철문이 열렸다. 아까 그 수사님은 가버렸고 성당지기가 스크루지 만큼 많은 열쇠 꾸러미를 한 보따리 매달고 나보다 더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아줌마는 왜 거기 있었수? 캄캄해졌으니까 빨리 나오쇼”
밖에는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어느 동네서 왔느냐고 물어보고는 트로이나 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마저 폭우로 끊겼으니 지방도로로 돌아가란다. 보통은 보스코가 지도를 보고 ‘왼쪽’ ‘오른쪽’ ‘직진’을 지시하는데 폭우 속에 지도 보랴, 길 찾으랴, 칠흑 속에 불 꺼진 시골마을을 지날 때면 길이라도 물으러 환하게 불이 켜있던 곳을 찾아가 보면 영락없이 동구 밖 공동묘지! 그날 밤엔 죽은 이들의 동네들만(공동묘지를 ‘네크로폴리’ 곧 ‘죽은 이들의 마을’이라고 부른다) 순례하고 10시가 다 되어 트로이나에 도착했다.
보스코를 보고 원망의 눈물을 터뜨리고 회원들 전부의 박수를 받으며 귀환했다. 어떻게 그 무서운 마피아의 동네에 동양여성 혼자만 보냈냐는 겁박에 보스코도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그날 밤, 마을마다 입구에 세워진 공동묘지는 나에게 오히려 빛을 나눠 주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하나의 연장선이어서, 결혼한 아들을 아래채로 내보내듯 죽은 이들은 동구 밖에 모여 살게 하고 거의 매일 찾아본다. 밤이면 외롭지 않게, 무섭지 않게 무덤마다 불이 밝혀져 있어 공동묘지 전체가 환하다. 해골로라도 죽은 이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문화가 저 기괴한 카타콤바의 ‘해골성당’(로마에도 있다)을 생겨나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산 이들에게나 죽은 이들에게나 생사의 경계를 넘어 한 마을이다.
서울을 막 벗어난 경부고속도로에 6중 추돌사고가 나 있었다. 속도의 폭력에 순식간에 이승을 떠난 저 희생자들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젖은 우리는 사흘의 애도 기간을 갖고서는 눈에 안 보이게 멀고 먼 산속으로 떠나보내고 잊어버리려 하겠지… 죽음을 다루는 문화가 퍽이나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