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3일 목요일, 맑음
엊그제 남해 언니가 농사를 짓는 일이 첨엔 재미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이 들고, 꼭 먹을 것도 아닌데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을 했지만, 형부가 말려도 멈추질 않았단다. 그러나 큰딸이 나무라자 자식 말은 듣게 되었는데, 농사에서 손을 놓고 나니 시간도 많이 나 할일도 더 하고 책도 읽고 힘도 안 들어 너무 좋단다. 그런데 나를 보면 예전의 당신 같아 안타까워 풀이라도 뽑아 주러 오고 싶더란다. 나도 요즘은 나이가 들어선지 밭일에 훨씬 게을러진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밭엘 내려가 보면 가물어서 잔뜩 움츠려 있던 씨앗들이 단비에 몸을 적시고 한꺼번에 “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오는 듯하다. 많이 누를수록 반동이 커서 튀어나오는 공처럼, 며칠 사이에 한 자나 커 오른 풀들은 얼마나 서두르는지 모른다, 빨리 자라나 씨를 맺어 후손을 남기고 서둘러 떠나려 한다.
나도 덩달아 바빠서 오늘 새벽동이 터오는 시각에 밭으로 내려갔다. 4시 40분! 동쪽으로부터 희미한 새벽이 열리는데 세상은 아직 흑백이다. 낫으로 풀을 쳐내 길을 만들어 밭에 이르니 밭에는 쇠비름이 마치 내가 정성스레 씨앗이라도 뿌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곱게 커 올라 있었다. 미안하지만 어쩌랴 나는 호미로 그것들을 긁어내고 보스코가 내려오자 함께 검은 비닐로 멀칭을 했다.
9시 30분까지 소낙비 맞은 듯 땀을 흘리고, 보스코가 싸들고 내려온 아침을 먹으려니까 손이 버들버들 떨리고 세상이 노랗게 보이도록 힘이 들었다. 이렇게 일한 여자에게 남편이 “동네아줌마라면 누구나 하는 일을 갖고 그리도 엄살이냐?” 했더라면 보스코도 나한테 혼났겠지만 그는 지극히 공손하게 예를 다하며 일손을 도왔다. 네 두럭을 대강대강 멀칭하고, 명을 다하고 스러져가는 채소들을 쳐내고, 올 여름 내 미션은 이것으로 마무리했다. 보스코가 낼 아침 예초기를 돌리면 이 밭은 알아서 여름을 보내리라…
소담정 도메니카가 보스코의 생일도 축하 할 겸, 우리가 떠나기 전이라고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이번 보스코의 생일은 한 주간 내리 축하연이 이어지는 것 같다. 나이 들어서도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사랑한다는 일은 아내인 나로서도 기분 좋다.
동의보감촌에서 식사를 한 후에 옆에 있는 커피점에 들렸는데 주인 아저씨가 기(氣)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어서 기를 측정하는 봉으로 자기 가게에 있는 물건들이 얼마나 기가 쎈가 보여 주는데 500년 된 느티나무 둥치와 1000년이 된 돌에서는 봉이 활짝 벌어지곤 하였다. 엄청난 기가 나오기 때문이란다. 말하자면 나무나 돌 같은 미물도 세월을 지켜온 오랜 경험을 그 안에 간직하고 영험한 기운으로 세상에 어떤 모양으로라도 간섭한다는 철학이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들은 하다못해 가족들을 대대로 먹여 살린 뒤꼍 장독대 앞에도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나 보다.
우리 동네에서도 음력 정월이면 마을입구 정자나무에 제를 올리는데 그 간절함이 하늘에 닿을 듯하다. 공소가 들어온지 40년이 지나도 천주교인이 5%도 안 되는 마을이지만 정화수 앞의 할메들 정성이든, 당산나무 밑의 마을 제사든, 우리가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모든 신앙에 하느님이 어떻게 간섭하셔서 우리 가난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지, 수백 년 마을 역사를 지켜온 느티나무 저 세 그루는 잘 알고 있다.
4시쯤 광주에서 정종표 신부님이 찾아오셨다. 막내 훈이 서방님의 살레시오중고등학교 동기이며, 보스코에게 종교수업을 받았던 학생이었단다. 80년대 보스코가 유학 갈 무렵 해병대 군종사제로 근무 중이어서 해병대 장성들의 신원보증서를 받아주어 신원조회에 걸린 보스코가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전두환의 철권 독재 시절의 슬픈 기억이다. 그때 로마로 유학을 떠났기에 ‘광주사태’ 이후의 참담한 시절을 보스코가 피해갈 수 있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은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