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9일 수요일, 맑음
스위스로 가져갈 짐으로 집안 전체가 폭탄 맞은 꼴이다. 가방 큰 것 두 개, 핸들링 가방 두 개로 세 달 가량 사는 짐을 모두 싸는 게 힘든 일이라, 집안에 여기저기에 펼쳐두고 더 필요한 물건부터 챙기는데 사실 이렇게 가져가서는 한 번도 안 입고 가져오는 옷도 있고, 하릴없이 많이 가져간 물건은 애물단지가 된다.
6·25 후 한국에 와서 수십 년 살다가 ‘이젠 한국도 살 만하다’고 더 가난한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나시던 살레시오회 선교사 원선오 신부님 생각이 난다. 평생을 살러 가시고 수십 년 살던 나라를 떠나시는데 짐이라고는 성무일도 기도서, 수단 한 벌, 내의 한 벌, 양말 두 개를 가방도 아닌 보자기 하나에 가풋하게 싸들고 공항으로 나가시더라는 보스코의 기억! 날마다 작은아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며 “사제들이 주님의 가난을 받아들여 자유롭게 하소서”라는 구절에서 우리가 더 간절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우리가 떠나기 전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4·19탑 앞에 있는 꽁보리밥 ‘신정’으로 인천 가정식 이탈리아식당 ‘디모니카’의 모니카. 이 엘리, 엄엘리, 내 페친 박현미씨가 찾아왔다. 그 집은 찬이 소박하고, 맛도 옛날 토속적인 맛이고, 담백하고 값싸게 먹을 수 있어 내가 지인들과 부담 없이 만나는 곳이다. 예전에는 할머니와 큰딸이 주모를 하며 식당을 꾸려갔는데, 할머니가 나이 드시고 몸이 아파 요양병원으로 떠나시자 막내딸이 가게를 맡고 있다.
친정엄니에게 잘 배운 대로 맛을 이어가기에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찾아간다. 오늘은 그나마 어린 주인마저 없기에 물어보니 어머니 뵈러 병원에 다니러 갔단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집안 살림에, 식당 운영에, 엄마 수발에 무척 피곤해 보였는데 그러다 가게라도 접을까 염려되는 게 내 욕심이다.
식후에는 무더위가 하도 심하고 여유도 두 시간밖에 없어 우리 집까지 못 오고 이엘리가 ‘강추하는’ ‘로팸’이라는 카페로 옮겨 얘기를 나눴다. 주인부부가 그릇을 모으는 마니아여서 예쁜 그릇이 엄청 많았다. 차도와 관련한 도자기를 모으는 미루가 오면 많이 좋아할 게다. 대부분이 손으로 그린 외국 도자기여서 외국 생활을 많이 했느냐, 어떻게 구했냐 물으니, 외국은 나간 일 없고 가는 곳마다 눈에 띄거나, 그림이나 잡지 등에서 열심히 찾아 사 모았단다.
일부만 가게에 있고 안쪽 창고와 살림집에는 더 많다니 이 부부는 평생을 그릇 모으는 낙으로 살다가 그 그릇을 이용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다. 나야 긴 시간 동안 외국에 살았더라도 80년대(81-86)는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로 일용한 양식이라도 주신다면 깡통에 담아서라도 오로지 고마워했을 테고, 남편의 교환교수 시절(97-98)이나 외교관 시절(03-07)에도 그릇에 담길 음식에 신경 쓰느라 음식 담을 그릇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 귀한 선물을 받거나 샀다가도 누군가 좋다고 두 번만 하면 “가져가세요”로 마감을 했으니 그릇이 모아질 일이 없었다. 누구한테서 엄청 비싸다는 다완을 얻었는데 거기에 커피 찌꺼기를 담아두다 미루한테 엄청 꾸중을 듣기도 했다.
‘디모니카’의 모니카야 그 집 그릇을 보다가 자기네 식당 그릇을 떠올리며 맘에 걸리는 것 같아 보여 ‘그대는 그대로 최고다. 비교하지 않는데에 자긍심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타일렀다. 좋은 그릇만 보이면 식사하는 손님이 안 보이기 쉽고, ‘고 비싼 그릇 상할까’ 염려하느니 차라리 없는 게 나으리라. 우리 일행은 ‘시월이 오면’ 다시 만나기로 뜨거운 허그를 나누고 헤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페친 현미씨를 만난 일은 커다란 선물이었다.
집으로 들아와서는 오늘로 칠순을 맞는 오빠에게 축하를 해주러 아랫동네 오빠네 집엘 갔다. 이젠 태극기 집회에 갈 때마다 열심히 모아온 태극기도, 유인물도 안 보이니 용서하기로 했다. 어린 시절 오빠에 대한 따뜻했던 추억을 간직하며 내가 더는 상처입지 않기를, 오빠에게도 명실공히 ‘태극기는 우리나라 깃발입니다’로 돌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