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3일 일요일, 맑음
어젯밤에는 천둥번개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하느님이 신나게 폭죽놀이를 하시다가 물놀이까지 하셨다. 당연히 날씨는 추웠다, 영상 18도! 낮의 온도가 28도가 안 된다. 서울에서 비오듯한 땀에 ‘아구 더워!’를 달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창문 좀 닫아야지’ 하는 걸로 봐서는 더위를 피해서 잘 왔다. 휴천재에 와 계시는 수녀님들이 하루 이틀은 더웠지만 오늘은 바람도 불어 살만하단다. 비온 후 맑은 하늘에 흰 구름과 저 멀리 알프스 자락 흰 눈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11시 미사에 갔다. 가족이 함께 미사 가는 숫자가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는 스위스는 여름휴가로 떠난 사람들이 많아도 성당은 가득하다. 60대 중반의 신부님은 유럽 사제들 특유의 넉넉함과 친절로 미사 후 교우 전부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다. 성당 내부도 그림과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성모상 앞에 초를 켜며 소원을 비는 중년 아줌마는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쉽게 보이는 얼굴이다. 세상사가 꼬이면 그래도 의탁할 분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성당 오가는 길에도 시아 시우는 어깨동무를 하고 꼭 붙어서 간다. ‘형제는 단 둘이다’를 보여주니 뒤에 따라 가는 할아버지는 그 광경만으로도 행복이 차고 넘친다. 집에서는 티격태격 다투다가도 하나가 안 보이면 서로를 찾으니 부모로서도 든든하단다. 시아는 공부도 잘하지만 자신에게 성가시게 하거나 무시하는 친구들에게는 단호하게 자신의 기분을 전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선을 긋는다.
장난꾸러기인 시우는 친구들이 귀찮게 한다고 형에게 일러바치면 그렇게 못 하도록 자존심을 지켜내는 방법을 동생한테 자상하게 가르쳐준단다. 유색인종으로 다인종사회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는 방법에 대해 꼬마 때부터 홀로서기를 배워간다. 한국에서 같은 민족끼리 사는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강인함이 느껴진다.
아침나절 손주들에게 「사자왕 형제」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두 꼬마가 다 책을 좋아해서, 어떤 때는 잠들기 전 엄마에게 다섯 권의 책을 들고 와 읽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단다. 엄마를 차지하는 술수이기도 하다. 내가 책 읽는 소리에 어른들까지 소리 죽여 자기 읽을 책을 읽는다. 둘은 하루에 게임하는 시간도 허락을 받고 노는데 시아는 20분, 시우는 16분 할당받는다. 왜 시우는 15분이 아니고 16분이냐니까 게임기를 켜고 끄는 데 익숙치 않아 15+1=16분이란다. 타임워치를 누르고 정확하게 그 시간을 지키고, 부모가 잠든 이른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몰래 하는 일은 없다. 거짓말 하는 걸 수용 안하는 사회분위기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스며있다.
점심 후에 책을 읽고 있는데 빵기가 시우 머리 파마도 마저 해달란다. 자기도 ‘엉아처럼’ 머리를 해 달라기에 너무 어린애가 하면 염색을 곁들여 파마를 하면 건강에 나쁘다고 미뤘더니 제 아빠를 졸랐나 보다. 아범도 인터넷을 보고 시작은 했는데 뜻대로 안 되더라며 어미를 찾으니 내가 등장하여 ‘짠~!’ 해결해 다. 빵기는 그 동안 시아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었다.
그러다 새치가 한 개 있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 말을 들은 시우가 “헝아 이제 어떻하니?” 라고 걱정에 한숨이다. 얼마 전 시우 머리에서 흰 머리칼 한 가닥이 보인 것 같다며 시아가 시우에게 했다는 말이 심각하다. “시우야! 너 흰머리 있다고 절대 부모님께 말하지 마라.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니!” 했다던 말을 기억하고 한 말이란다. 아무튼 아빠의 수영 바지를 머리에 거꾸로 쓰고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을 머리에 쏘인 시우의 머리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저녁식사 후 아파트와 바로 연계된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시아와 시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고 돌아오고 생명이 넘치는 그 몸놀림에 우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받는다. 재작년만 해도 밀을 갈았던 널따란 들이 잡초의 천국이 되었다. ‘왕의 촛대’라고 부르는 풀들이 들을 가득 채워 인간이 없어도 생물은 건재함을 다시 보여준다. 미라벨이라 부르는 개자두도 실컷 땄다.